비바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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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라 비크햄과 브렌단 월쉬
  • 승인 2016.05.2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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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집 이야기]

우리는 우리 일생의 반보다 더 오랫동안 마운트가에서 “스프를 끓이고”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살아왔다. 2003년 10월 비바 하우스는 35주년을 기념한다. 지나온 세월은 어려웠지만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 일은 자주 우리를 지치게 했지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가 가톨릭일꾼이 되었는지 생각한다. 더 중요하게는, 때때로 왜 아직도 우리가 가톨릭일꾼운동에 관여하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간단한 대답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가톨릭일꾼운동과도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참으로 “사랑은 잣대”이고 가톨릭일꾼의 철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저항과 관상을 통합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전쟁을 만드는 사람들의 문화에 저항하는 것은 고유하고도 건강한 생활방식을 마련해준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가 말했듯이, 이 일은 자주 “두려움과 고난”과 함께 끝없이 이어진다. 

윌라는 시카고 서부지역의 한 노동자 가족 출신이고 요셉 수도원 (일리노이주 라 그랑쥬)에서 8년 동안 수녀생활을 했다. 그때 윌라는 공동체 생활에 대하여 배웠고, 젊은 수녀로서 미시시피주 안킬라에서 자유의 여름을 보냈다. 그는 수녀원을 떠났고 시카고 시내에서 잠시동안 일했으며 새로운 평신도공동체인 요셉 하우스에 합류하기 위하여 발티모어로 옮겼다.

요셉 하우스는 세인트 피터 클라버 본당에 있었는 데, 그곳 본당의 보좌신부가 필 베리간이었다. 필은 윌라에게 가톨릭일꾼운동과 도로시 데이의 저서들을 소개해 주었다. 필은 또한 윌라에게 베트남전쟁과 인종차별, 가난과의 연결에 대하여, 부자와 가난한 이들을 분리시키고 있는 거대한 틈에 대하여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또한 세상의 “권세와 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비폭력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윌라는 가톨릭일꾼이 그러한 공동체 모형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또한 동시에 윌라는 브렌단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브렌단도 윌라와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윌라처럼, 브렌단도 전통적인 가톨릭교육과 양육의 배경을 갖고 있다. 그는 18년 반의 가톨릭학교 교육을 받았는데 그 중 8년간은 예수회 계통 교육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뉴욕대교구의 성 요셉 신학교에서 2년 반을 지냈다. 브렌단은 교의, 교회법 그리고 “정의로운 전쟁이론”에 뿌리를 굳건히 박고 있었다.

그 당시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일꾼운동은 교회 안에서 결코 토론의 주제가 되지 않았다. 브렌단은 뉴욕시에서 났고 자랐고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뉴욕시는 가톨릭일꾼운동의 탄생지이다. 그러나 브렌단이 학교에 다닐 때 아무도, 단 한 명도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하여 말해주지 않았다. 대학에 다닐 때 브렌단은 예수회의 다니엘 베리간 신부의 제자였다. 댄의 수업은 도로시 데이, 가톨릭일꾼운동을 소개해주었고 복음의 요구에 대하여 알려주었다.

브렌단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였다. 비폭력, 사랑의 공동체 그리고 사랑과 정의의 위대한 계명. 그래서 메타노이아,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후 브렌단은 (윌라가 한 때 그랬던 것처럼)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복음을 살아내는 최상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틀렸다. 신학교에서 그는 안전하고 안정이 되었지만 그 또래의 남자들은 당시 베트남전쟁의 징집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뉴욕 가톨릭일꾼공동체의 구성원인 데이브 밀러(그는 브렌단의 친구이며 같은 대학 출신이었다)는 1966년 10월 공개적으로 징집영장을 태우며 베트남전쟁에 항의하였고 선발징병제 전체에 도전하였다. 브렌단은 신학교에 다닐 때 데이브의 이 행동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신학교에는 이런 “법률위반”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었다. 신학교 교수로부터 평화주의가 가톨릭의 입장이 아니며 전쟁들은 “옳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데이브 밀러는 “잘못된 양심” 속에 있는 것이고 물론 사람은 양심이 잘못되었다 해도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살인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 잘못된 양심이라고! 이 사건이 브렌단에게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신학교를 떠났고 그의 “잘못된 양심”을 단호하게 붙들었다.

수일 후, 브렌단은 다니엘 베리간을 만났다. 댄은 발티모어에 있는 그의 형 필과 새롭게 창설된 발티모어 다종교평화사명과 일하도록 제의했다. 브렌단은 1967년 성주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발티모어로 갔다. 그의 삶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필이 부임하고 있었던 발티모어의 세인트 피터 클라버 성당에서 윌라와 브렌단은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윌라와 브렌단) 시간을 허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데이브 밀러와 부인인 캐시가 워싱톤시에 성 야고버 가톨릭일꾼 집을 방금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데이브는 징집영장 소각사건으로 재판에 걸려 지쳐 있었고 수감생활의 시작을 기다리 고 있었다. 우리는 필과 이 문제를 의논했고 데이브 부부를 돕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워싱톤으로 가서 수개월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우리는 “스프 끓이는”법을 배웠고 가톨릭일꾼운동을 깊이 끌어안았고 서로에 대한 사랑도 확인하였다. 5개월간의 실습이 끝난 후, 우 리는 1967년 12월에 결혼했다.

결혼한 후 우리는 발티모어로 돌아왔고 1968년 10월에 비바 하우스를 열었다. 우리의 첫 번째 손님들은 캔톤스빌의 9명과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9”명은 발티모어 교외에서 600장의 베트남 징집영장을 태웠고 10월 첫 주 동안 재판에 계류 중이었다. 두 주일간, 우리의 집은 밤낮으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재판동안 도로시 데이가 우리와 함께 있어 너무나 기뻤고 비바 하우스가 환대와 저항이라는 이중의 방향을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35년 동안의 삶을 기억해보자면 많은 페이지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위한 임시거처를 제공하였고, 백만 명에 가까운 식사를 준비했으며, 이웃들을 위하여 식사를 나누었고 지난 5년 동안은 매 주마다 수일동안 도로시 데이 독서반에 오는 아이들로 집안이 법석거리고 있다.

지금까지 가장 큰 사건은 1969년 우리들의 딸 케이트가 태어난 사건이다. 우리 집 동네에는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있었고 언제나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케이트의 출생은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진짜로 비바 하우스를 이웃으로 만들어주었다. 실제로 우리에게 아이가 없었다면, 이웃으로부터 그렇게 따스한 환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1973년에 우리는 도로시로부터 격려하는 편지를 받았다. 데이는 우리가 “아직도 이 집에서 살고 있고 이웃과 공동체가 되어가서” 기쁘다고 했다. 데이는 또한 비바 하우스가 “결혼한 부부들이 어떻게 환대의 삶을 살아가며 변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작은 징표”라고 말했다. 오늘날, 전국으로부터 또한 전 세계에서 회보들을 받으면서 젊은 부부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가톨릭일꾼공동체를 시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용기를 얻는다. 또한 우리의 딸 케이트와 그의 남편인 데이브가 뉴욕의 브롱스로부터 발티모어로 이사왔을 때 더 격려를 얻었다.

그들은 우리 일에 합류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집 가까이 살고 있고 케이트는 아이들을 위한 도로시 데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데이브는 공선 변호사로 일한다. 그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을 위한 법률 보조를 제공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손자 둘이 있다. 마야는 4살이고 그레이스는 2살이다. 우리는 새로운 가톨릭일꾼운동의 전통을 주도했다고 생각한다.... 공동 체를 원합니까? 당신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십시오! (2003년 5월)

출처: <참사람되어> 2010. 9. 
원문출처: <The Catholic Worker> 2003. 5. by 윌라 비크햄과 브렌단 월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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