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요한의 반-성전 메시아 운동을 계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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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요한의 반-성전 메시아 운동을 계승하다
  • 김진호
  • 승인 2019.05.2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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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수행자와 ‘장벽 저편 사람들’의 기억-2

광야 수행자

광야 수행자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를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렀다. 일부 전승에 의하면 그는 평제사장인  즈카르야의 아들로 알려졌지만,(루카 1,5-25)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도 반증할 근거도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마치 엘리야처럼 광야의 예언자로 행세했다는 것이다.

엘리야 예언자는 기원전 9세기 이스라엘국의 아합 왕(재위: 기원전 868~854) 때 활동했던 비판적인 재야예언자였는데, 그의 반체제성과 민중성 탓에 주류사회에서는 그를 거의 기억하지 않았지만 대중전승 속에는 누구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존재였다. 그래서 그가 사라진 뒤(어떤 이유로든 사망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대중은 그가 죽지 않은 채 불타는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전승이 길이 남았다.(2열왕 2,11) 이것은 그가 다시 내려올 것이라는 믿음과 결합되었다. 바로 이날은 메시아가 도래하여 하느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날이었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말라 4,5)

요한은 자신이 바로 그이라고, 땅으로 다시 내려온 엘리야라고 주장했다. 그것을 시연하는 그의 방식은 엘리야가 입었다던 옷차림과 먹거리로 사는 것이었다.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을 만나서 그러한 말을 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더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는 분명히 디셉 사람 엘리야다” 하고 외쳤다.(2열왕 1,8)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마르 1,6)

〈마르코복음〉에서 유래한 복음서 전승 안에는 그가 환생한 엘리야이며 심지어 헤롯왕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대중의 믿음이 엿보이고 있다. 그가 엘리야처럼 죽었지만 엘리야가 그랬듯이 부활했다고 생각했다는 소문이 널리 확산되었다.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 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또 더러는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그런데 헤롯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말하기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하였다.(마르 6,14-16)

 

죄를 용서해주는 회개의 세례, 그 변혁적 정치성

요한은 ‘세례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주된 메시지와 연결된다. 그는 외쳤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1) 그리고는 그에게로 온 이들에게 ‘죄를 사면하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마르 1,4) 죄를 사면받기 위해선 성전에서 속죄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의 율법이다. 유대사회는 더욱 그런 믿음이 강렬했다. 그런데 요한은 대신 세례를 받으러 자신에게로 오라 한다.

유대인의 신앙에 의하면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다. 이곳을 기초로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된다. 그래서 과거 유다국 왕도에는 성전이 있었다. 반면 이스라엘국에는 왕실과 국가성전이 분리되어 있었다. 또 국가성전도 하나가 아니었다. 물론 유다국도 그랬다. 하지만 유다국에선 요시야 왕 이후 생겨난 중앙성전 중심주의가 오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유대아 지역에선 서서히 중앙성전 중심주의가 정착되어 갔다.

그런 유대사회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하느님의 통치가 구현된다는 믿음이 강력하게 발전했다. 하여 유대주의에 경도된 외지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고, 그들 중에는 아예 그곳에 머물러 살기로 한 이들도 많았다. 바로 그런 곳에서 수행되는 제사는 죄사함을 받는 데 있어 어느 제사보다 우월했다.

그런데 그 제사는 ‘값비싼 제사’였다. 헤롯 이후 예루살렘 성전은 유례없이 비대해졌다. 건물만 거대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재화가 비축되어 있고 또 귀족들의 토지문서 등 중요한 기록물들이 보관된 문서고이기도 했다. 하여 그것을 관리하는 행정직 사제들과 경비하는 경찰들이 필요했다. 그들은 모두 성전에서 생활비를 지급받는 인력이었다.

또 제사 업무에 종사하는 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 다수는 인근지역에서 차출되어 무임으로 일했지만 그들을 관리하는 제사직 사제들은 성전의 녹을 먹고 사는 자들이다. 물론 무급의 제사장들도 의복이나 식비는 성전에서 조달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성전 지출은 고위사제들이 착복하는 엄청난 재화였다.

성전은 대단한 재원이 필요했다. 제사제도가 그러한 재원을 조달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였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그중 핵심은 기부금과 제사 제물 판매수입이다. 여기서 제사 제물이란 죄사함을 위해 바치는 양, 소, 염소 등을 말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제사용으로 사육한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제사용 제물을 사육하고 판매하는 일은 성전이 지정한 독점업체가 맡았다. 그 업체는 막대한 선납금을 주고 독점권을 불하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독점을 통해 훨씬 더 큰 초과이윤을 획득했다. 한편 기부금도 같은 방식이었다. 그것은 현물이거나 현금으로 바쳤는데, 성전이 지정한 독점업체로부터 교환된 것이어야 했다.

이런 제사시스템은 제사가 죄사함의 장치만이 아니라 죄인을 양산하는 장치이기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에는 제물을 바칠 여유가 없는 이들은 산이나 집에서 비둘기를 잡아서 제물을 대신할 수 있다는 유보조항이 있었다.(〈레위기〉 4,7) 하지만 요한과 예수의 시대에는 대중이 집 주변 혹은 산에서 잡은 비둘기로도 죄사함의 제사를 치룰 수 없었다. 그것마저도 독점업체가 사육한 ‘흠 없는 제물’로 교환되어야 했고, 역시 엄청난 마진이 붙은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바로 그랬기에 예수도 훗날 성전에 갔을 때 이 독점업체의 매대(賣臺)들을 뒤엎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그런데 요한은 그런 죄 사면이 아닌 다른 사면의 방식을 주장했다. ‘세례’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부르짖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도래했다.”는 말의 의미이기도 했다. 그 나라는 백성을 갈취하고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불의한 나라였다. 현존하는 그 나라에서는 그렇게 갈취당하는 이들이 도리어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채 짓눌려 살아야 했다.

요한은 그런 이들을 향해 하늘나라가 곧 도래할 것이니 속히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사면을 위해서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 값비싼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다. 베레아 광야와 인접한 요르단 물가에서 세례를 받으면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은 곧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얻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요한이 주장한 메시지였다. 이것은 ‘불의한’ 성전 체제와 그 체제의 지배기구이자 일종의 유대의 원로원인 산헤드린, 그리고 그 배후의 로마 제국을 향한 정면도전이 아닐 수 없다.

성전체제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은 요한에게서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8세기의 반체제 예언자 미가에게서도 나타난다. 또 그 얼마 후에 활동한 우리야와 예레미야 예언자도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의 ‘리버디노라고 불리는’(τῆς λεγομένης Λιβερτίνων) 회당에서 예수운동을 펼치다 처형당한 스테파노, 그리고 지중해의 예수파 활동가 바울의 서신이나 〈마르코복음〉에도 성전체제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 담겨 있다.

"올바른 것을 역겨워하고 올곧은 것마다 왜곡하는 야곱 집안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안의 지도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피로 시온을, 불의로 예루살렘을 세운다. 그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받아 판결을 내리고 사제들은 값을 받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느냐? 우리에게는 재앙이 닥칠 리 없다.” 하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때문에 시온은 갈아엎어져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폐허 더미가 되며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수풀 언덕이 되리라."(미카 3,9-12)

"그 당시에 주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기럇여아림 사람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였다. 그도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으로, 이 도성과 이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하였다."(예레 26.10)

"다윗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서, 야곱 집안을 위하여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지만, 하느님을 위하여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이는 예언자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이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않았느냐?’"(사도 7,46-50)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하가르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나이산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이 그 자녀들과 함께 종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갈라 4,24-26)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르 15, 37-38)

이와 같이 ‘반성전주의’는 오래 전부터 권력 비판 전통에 속하는 구호의 한 전형이었다. 물론 이때 권력은 성전 체제와 그 배후의 정치권력을 뜻한다. 요한은 이러한 급진주의 전통을 되살린 예언자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로 수많은 대중이 몰려왔다. 바야흐로 팔레스티나는 요한으로 인해 혁명의 기운이 감돌았다.

 

두초 디 부오닌세냐,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심"

요한의 죽음 그리고 부활

성전 당국은 그를 좌시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요한은 유대지역이 베레아의 광야에서 활동한 예언자였다. 그리고 베레아는 성전당국의 정치적 관할영역 밖이었다. 유대아-이두매아-사마리아, 이 세 지역은 아르켈라오스의 영토였다가 그가 축출된 서기 6년 이후 황제의 직속령이었다. 요한과 예수 당시에 황제를 대리해서 이 지역을 통치하는 이는 빌라도였다. 그러나 빌라도가 거느린 로마병사는 천 명 안팎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지역의 각 지방은 대지주 귀족들로 구성된 정치체인 산헤드린이 통치권을 위임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이중 유대아 지방의 산헤드린은 예루살렘 성전의 수장인 대제사장을 위시한 사제와 평신도 귀족들로 구성되었다.

한편 베레아와 갈릴래아는 안티파스의 영토였다. 그러니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요한이 아무리 미워도 안티파스의 영토에서 활동하는 이를 잡으려고 국경너머로 군대를 파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요한은 매우 용이주도하게 반예루살렘적 메시아운동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한이 안티파스와 충돌했다. 안티파스가 자신의 이복조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미 아내가 있었던 그가 제2의 아내를 취하려 하는 것 자체가 법적으로 문제될 일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1아내인 파샬리스가 이웃의 강대국인 나바태아국의 공주였다는 데 있었다. 게다가 장인은 이 나라의 국력을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일으킨 통치자인 아레타스 4세였다. 그의 딸 파샬리스가 남편의 바람기에 화가 나서 몰래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동안 꽤 성공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안티파스의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 안팎으로 그에 대한 비난이 잇달았다. 게다가 백성들도 안티파스의 결혼행각에 대해 비난 여론이 드높았다.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체제비판적 인사들은 20년 전쯤의 아르켈라오스처럼 그도 축출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던 듯하다. 요한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서 요한은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대중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이가 비판의 대열에 나서자 나쁜 여론은 더욱 악회되었을 것이다. 이에 안티파스는 요한과 그 일당이 주도하는 집회를 군대를 동원해서 급습했다.

주모자 요한이 체포되었다. 그는 사해 동편의 요새 마카이루스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곧 그를 처형했다. 한데 요한이 체포되던 날, 그곳에 있던 그의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 그를 지지하던 대중은 어떻게 되었을까. 필시 많은 이들이 죽었겠다. 또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겠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은 군대의 칼날을 피해 흩어졌을 것이다. 그중에는 훗날을 도모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요한이 벌인 메시아 운동의 일원인 예수,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다. 요한의 추종자였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예수는 〈마르코복음〉 1,14처럼 진압군의 살기어린 칼날을 피해 갈릴래아로 되돌아 왔다. 하지만,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조심스럽게 활동 재개를 모색한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동조자를 규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6-20)

〈요한복음〉에 따르면 최초로 예수가 만난 이들인 시몬-안드레아 형제와 야고보-요한 형제가 원래 요한의 추종자였다.(요한 1,35-42). 이것은 개연성이 있다. 예수가 안티파스의 군대를 피해 갈릴래아로 왔다면, 익숙한 곳인 나사렛으로 갔을 법한데 느닷없이 가파르나움으로 간 것은, 그곳의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다시 시작할 요량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수는 요한처럼 “때가 찼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고 외쳤다. 그리고 대중은 그를 부활한 요한이라고 믿었다.(마르 6,14-16)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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