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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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방진선
  • 승인 2019.05.2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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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아 피천득 선생 선종 12주년

금아 피천득 프란치스코 선생님 (琴兒 皮千得, 1910년 5월 29일(음력 4월 21일) ~ 2007년 5월 25일) 선종 12주년!

2002년 정채봉 프란치스코 선생님의 1주기 추모식에서 구순의 단아한 모습을 뵌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두 분의 각별한 "인연"을 알기에 아마 천국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모시고 도란 도란 지내시리라 생각합니다.

피천득
-정채봉

선생님, 
제 마음은 상처가 아물 날이 없습니다

정 선생, 
내가 내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 없어서 그렇지 
천사의 눈으로 내 마음을 본다면 
누더기 마음입니다

인연
-피천득

무슨 인연으로 당신을 만났을까요
얼마나 고운 인연이기에 
우리는 만났을까요.

내숨결의 주인인 당신을 바라봅니다.
내영혼의 고향인 당신을 바라봅니다.

피고지는 인연이 다해도 기어이 마주할 당신이기에 
머리카락 베어다 신발 만들어 드리고픈 당신이기에

영혼을 불밝혀 그대에게 드리나니
부디 한 걸음도 헛되지 않기를

살아가고 숨쉬는 날의 꿈같은 당신이기에 
마른 하늘 보담아 꽃피울 당신이기에 
그립다 말하기 전에 
가슴이 먼저 아는 당신이기에 
애닯다 입열기 전에 마음이 먼저 안긴 당신이기에

소망의 노래로
당신위해 기원하나니 
이 인연이 다하고나도
당신앞에 다시 서게 하소서 
(부분)

국망(国亡)의 해에 나셔 현대사의 온갖 질곡을 견디면서 맺은 선생님의 수많은 "인연"은 지금 어떠할까!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나의 사랑하는 생활)는 선생님의 사랑론을 새기며 제 사랑의 상태를 성찰합니다.

끔찍이 사랑하는 이는 누구인가 ?
미워하는 이는 얼마나 많은가 ?
좋아하는 이는 헤아릴 수 있는가 ?

5월에 생명의 옷을 입으시고 기여코 5월에 생명의 옷을 벗으시고 가신 금아 선생님! 금아 선생님의 삶이 녹아있는 <5월>의 글을 찬찬히 읽으며 선생님의 명복을 기도드립니다.

선생님! 온갖 격차와 불평등, 물질만능과 승자독식의 풍조로 순정한 인간미를 시나브로 잃어가고 갈등과 분노가 커져가는 저희 마음이 선생님의 바램처럼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도록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5월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 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 가락지이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 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의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섬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이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 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방진선 토마스 모어
남양주 수동성당 노(老)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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