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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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 한상봉
  • 승인 2019.05.12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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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삼일만세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데, 윤동주 만큼 서럽고 안타까운 얼굴이 또 있을까, 싶다. 유배된 남의 땅 연변 용정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 신앙에 사무쳤던 문학청년에게 행복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윤동주는 복음서에서 산상설교를 읽으며 <팔복>(八福)이란 시를 지었는데, 아주 단순하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여덟 번 부르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라 했다. 도대체 왜 슬픔이 ‘복’이란 말인가.

<십자가>라는 시에선,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며, 자신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 가는 하늘밑에/조용히 흘리겠다”고 다짐하니, 더욱 난감하다.

 

괴롭고 슬프지만 행복한 사나이였다는 예수님에게, 그 행복은 어떤 색채였을까 궁금하다. 영어성경에서는 산상설교의 “행복하다”를 “해피”(happy)로 번역하지 않는다. 이 말은 “좋은 하루 보내!”(have a nice day!)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해피의 햅(hap)은 “행운”이란 뜻이다. 그러니, 우리가 바라는 “해피”는 운 좋게 미남미녀로 잘 생기고, 부잣집에 태어나고, 복권에 당첨되어 기분이 째지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윤동주나 예수님처럼 ‘불행한’ 사람도 없다. 두 분 모두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평생 고생하다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슬픔과 고통과 가난과 박해가 그들의 몫이었다. 그런 분을 ‘주님’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인은 참 복도 없는 셈이다.

그런데 영어성경엔 “해피”가 아니라 “블레시드”(blessed)라고 번역되어 있다. “하느님의 축복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살아서 고통 받았지만, 죽어서 사람들 마음에 깊이 감동으로 아로새겨진 분이 윤동주와 예수님이라면 그 말이 이 말이다.

본래 복음서는 그리스어로 지어졌다. 그리스어로 진복팔단의 “행복하다”는 “마카리오스”(makarios)다. 이 말은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에 나오는 그 “행복”이다. 이것은 ‘횡재한’ 즐거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참된’ 기쁨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의 끝없는 슬픔은 끝없는 사랑으로만 치유된다”(265항)고 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의 식민지 백성들을 “목자를 잃은 양떼처럼” 측은하게 보셨던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삼는 공감능력에서 구원이 시작된다. 그가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는 경지에 닿아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축복 가운데서, ‘사랑의 사람’이 된다.

*이 글은 천주교 수원교구 주보 5월 12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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