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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의 목적과 방법

가톨릭일꾼운동의 목적은 예수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속에 계승된 히브리성경과 그리스성경에 우리 삶의 원천을 두고 있으며, “거룩함에서 뛰어난 남녀성인들,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살아있는 증인들”인 모든 성인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있다.

이러한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이 운동을 시작한 창립자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만든 세상보다 훨씬 편안한 상황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다”고 말씀하시는 도로시 데이 여사와 “사람들이 선해지기가 더 쉬운” 사회를 세우고자 했던 피터 모린의 말씀을 상기한다.

우리사회를 돌아볼 때, 생산수단과 부의 지배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이며, 소유에 대한 지배적인 관심과 물질적 이득에 대한 관심, 그리고 체면과 평범함의 강조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르주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는 하느님의 정의와 매우 멀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경제분야에서: 사유 자본주의와 국가 자본주의는 부의 불공평한 분배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이익 중심의 동기가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땀을 먹고 살며, 권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그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빼앗기고 있다. 고리대금업(관리비용보다 더 높은 이자비율)은 이렇게 불의한 체제를 만드는 주범이다. 우리는 국가부채의 위기가 가난한 나라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그들을 부유한 나라에 종속시키고 있음을 보며 이 굴레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것 같은 현실을 안타깝게 느끼고 있다. 여기 미국에서는 수많은 굶주린 이들, 집 없는 이들 그리고 실업자들이, 늘어나는 풍요 한 가운데에서 고통 받고 있다.

-노동분야에서: 인간적 요구가 더 이상 노동의 이유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대신 고삐 풀린 말처럼 확장되는 기술은 자본주의에 꼭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발전”으로 환영받는다. 직업은 이제 생산성과 “고단위의 기술” 관리에 치중되어 있고, 군수산업, 일회용 소비상품의 사회가 되어가고 노동자들은 인류복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일에 매몰되어가고 있다.

나아가 고도로 전문화 되어가는 직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의미 있는 일에서 제외되며, 그들 노동의 생산품으로부터 소외된다. 농업에 있어서도 농산물 가공업이 실제 농사일을 대치하고 있으며 모든 분야에서 도덕적인 구속의 편자는 이제 전혀 제동을 걸 수 없을 만큼 닳아버렸으며, 자연법에 대한 경시는 우주를 위협하고 있다.

-정치분야에서: 국가는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 국가권력은 기술의 발전과 손을 잡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과학과 기업의 이익이 최우선 순위에 놓이며 구체적인 정책들이 그러한 관점에서 결정되고 잇다. 거대한 기구를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는 관료주의 체제를 표방한다.

이 관료주의체제는 아무에게도 책임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상태이다. 관료주의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비인격적일 뿐 아니라 합리화의 명수이다. 엄청난 불평등을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효과적이며 정치적인 장치는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도덕분야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인격체에 대한 비뚤어진 관념으로 인해 와해되고 있다. 계급, 인종, 성적 차이는 오늘날 사회 속에서 인간의 가치와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성향은 착취를 날로 증가시키는 구조를 낳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는 재물과 그 분배조절에 있어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을 영원한 갈등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생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기되거나 수용시설을 통하여 “폐기처분”되고 있는 상황이다. 영적인 황폐함이 두루 퍼져 있으며, 고립과 광란, 난잡함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무력경쟁: 무력경쟁은 우리시대의 방향과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분명한 징조이다. 무력경쟁은 거의 인류전체를 파멸시킬 지경에 와있으며, 전멸의 두려움, 그리고 생명에 대한 기본권리의 부정이 극도에 달해있다. 무력경쟁과 파멸은 이제 나란히 함께 있게 되었다. “무력경쟁은 인류에게 결코 방심할 수 없는 함정이며, 가난한 이들을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훼손하는 장본인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우리 자신과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 대처하면서, 교회의 전통 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공동선에 관한 원칙이 우뚝 서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공동선의 원칙은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신앙 안에서 각자의 이익이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바로 이러한 사회를 위하여 우리는 다음을 지지한다:

-인격주의: 모든 도덕의 근간과 핵심, 그리고 목표를 인간 각자의 자유와 존엄성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지혜를 따르면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에서 이웃의 선을 향하여 움직여 간다. 이것은 국가나 다른 어떤 시설들이 비인격적인 “자선”을 계속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고, 현실조건을 변화시키는 개인적 책임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이러한 철학으로 쇄신되기를 기도한다. 또한 참여의 과정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으로 환영받고 피터 모린이 가르쳤던 온유한 인격주의에 의해 함께 참여하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평등하게 참여하는 사회: 정부, 산업, 교육, 의료, 농업 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중앙집권적인 경향이 압도하는 현재 사회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사회로 변화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가족농업 경영제, 도시와 농촌의 토지신탁제, 소공장의 노동자소유 및 경영참여제, 자작농장제, 생활과 주거 협동조합 등 돈을 단순한 물물교환의 도구에 불과하게 하는 모든 노력들을 옹호한다. 이러한 노력들은 인간을 더 이상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노력들인 것이다.

-녹색혁명: 우리는 우리노동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땅과 우리와의 참된 결속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공존사회, 농업과 수공업 그리고 참 기술로 자급자족하는 생활, 사람들이 자신의 땅과 노동에서 나오는 열매로 살아가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 상호의존성을 느끼고 결속하는 사회, 갈등을 해결하려는 성실한 자세가 살아있는 사회를 우리는 지향한다. 우리는 이러한 개인적 사회적 변혁이 예수께서 당신의 희생적 사랑을 통하여 드러내신 방법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Christ at Table / Christ of the Soup Kitchen by Fritz Eichenberg

우리의 모범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와 그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찬례로서, 우리는 다음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

1. 비폭력 행위: “평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9) 비폭력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한 가지 악이 다른 악을 대처하는 식의 혁명이 아닌, 인격적인 참 혁명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든 생명을 앗아가는 모든 고의적인 행동을 반대하며, 모든 종류의 억압을 하느님께 대한 모독 행위로 간주한다.

예수께서는 고통을 이웃에게 지우지 말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 져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며, 기도와 단식과 악에 대한 비타협이라는 영적무기를 가지고 폭력과 싸워야 한다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전쟁에 사용되는 세금을 거부하고, 징집을 거부하며, 불의한 법률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것, 비폭력적 파업과 태업에 참여하는 것, 항의시위와 밤샘, 불의한 제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 공동협력적 모금과 공동대부제의 실천 등은 모두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훌륭한 방법들이다.

2. 애덕 행위: (마태 25,31-46에 따라) 이웃사랑은 복음의 핵심이며 “우리들 중의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자매”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분명히 제시하는 지침이다. 가난한 이웃이 머물 수 있는 집들은 사랑의 행위를 배울 수 있는 학교이며,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은 정의에 의하여 자기들의 몫을 받을 수 있다. 우리 벽장 속에서 여분의 옷들, 우리 집에서 여분의 방, 우리 식탁에서 여분의 자리는 모두 가난한 이들의 몫이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하나도 가지지 못한 이들의 몫이다.

3. 육체노동 행위: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는 노동을 경시하고 거기에 존엄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공동협력을 꾀하고, 장벽을 없애고 형제애의 정신을 쌓는다는 것 외에도, 육체노동은 우리의 손과 몸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볼 수 있게 한다.”(도로시 데이) 또한 인간의 노동은 세상의 변화와 하느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

4. 자발적인 가난 실천: “가난의 신비는 그것을 나누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웃에게 줌으로써 우리 자신은 가난해지나, 사랑에 대한 지식과 믿음은 더욱 증가된다.”(도로시 데이) 자발적 가난을 끌어안음으로서, 다시 말하자면, 강요된 가난을 살 수밖에 없는 이들과 자발적으로 우리 몫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는 은총을 청하게 된다. 자발적 가난은 교회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육화시키는 지름길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실패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희생과 고통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결정하는 성공, 그것은 우리의 판단에서 결정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어떻게 그분의 진리를 사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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