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가 괴테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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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가 괴테를 읽다
  • 한상봉
  • 승인 2019.05.0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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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쓰고-파괴하다>, 이화경, 행성B잎새, 2017

[지난 사순절에 <공동선>5-6월호에 보낸 글을 다시 올린다. 희망을 희망인채로 남겨두지 않는 각박한 세월을 읽는 법을 생각해 본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 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기형도, ‘노인들’ 중에서)

사순절이다. 우리들의 사순절은 부활절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슬프지 않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순절은 불순하다. 부활을 경험한 이후에 쓰여진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생전에 이미 여러 차례 “나를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일어나리라”고 예고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정말 예수는 고통 속에서 부활을 예감했을까?

“압바,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묻던 예수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절망’뿐이다. 오롯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걸어왔지만 종당에 노예들만이 감당할 수 있었던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사나이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없이 하느님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분의 고통이 ‘그럼에도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을 우리에게 던져 주는 것은 아닐까.

사순절은 안온한 사랑을 꾸짖는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일러바친다. 예수는 “내 나이와 거리가 먼 슬픔”을 안고 나뭇가지처럼 그 봄에 목숨을 꺽었다. 그것은 로마제국과 부패한 유다의 성전세력이 앙갚음한 것이었으나, 예수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기꺼이 선택한 운명이기도 했다. 안온한 사랑은 예수의 이름으로 호사를 누리고, 종교적-정치적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할 뿐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 강단에 서기를 즐겨하지만,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환대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다. 기도하기를 좋아하지만,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순절에 <사랑하고 쓰고-파괴하다>(이화경, 행성B잎새, 2017)라는 책이 갖는 의미는 제목만큼 각별하다.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 앞에서 “이제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글쓰기의 고단함과 일상의 노동으로 창의성이 고갈 될 때 ‘집안의 천사’부터 죽이라던 버지니아 울프. 의지가 약해져 주저앉고 싶을 때 “일어서서 걸으라. 네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라고 부추기던 잉게보르크 바흐만. 남들의 시선에 상처받을 시간에 사랑하는 이들과 ‘서둘러’ 사랑하고, 어제보다 오늘을 ‘더’ 사랑하는데 힘을 쏟았던 조르주 상드.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함께 하고, 함께 울었던 수전 손택 등. 이들은 이화영에게 “세상의 진실과 살아가는 방법을 전수해주고 삶의 의혹을 풀어준” 스승이며 동료였다.

이들은 “감옥에서, 재판정에서, 부엌에서, 책상 앞에서, 거리에서, 손수건 위에서, 증오와 혐오와 차별과 절망의 한복판에서 사랑하고, 쓰고, 파괴했던” 사람들이었다. 이화경은 이 사람을 “거리에서 성찰하고, 대학 도서관에서 쫓겨나 계단에서 통찰하고, 부엌에서 고민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탐색했다”고 밝히고 있다. 진실을 찾아나서는 길에 안전지대는 없다. 이참에 기형도가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사순절에 무참하게 부러졌지만 그래도 타인의 영혼 안에서 온전히 살아있는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항쟁 같은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

이화경은 룩셈부르크를 입에 올리기 전에 이렇게 적었다. “살다 보면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어떤 삽질로도 메워지지 않는 순간이, 영원히 복구도 복원도 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될 순간이, 피눈물이 온몸에 차올라 그 무게로 쓰러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1871년 3월 5일 폴란드의 자모시치에서 태어난 유대인 목재상의 막내딸로 태어난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섯 살 때 골수 결핵에 걸렸다.

그 후 그녀는 걸을 때마다 엉덩이가 흔들리고 한족 다리를 저는 장애를 얻었다. 유대인이며 장애인이라는 이중적 차별 속에 놓이면서, 일찍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함에서 떠나야 했다. 진작에 생의 비극성을 간파한 어린 로자는 숨어있는 진실을 찾기 위해 독서에 몰입했다. 이화경은 이때의 로자를 “짙은 눈썹, 진지함과 깊은 슬픔이 깃든 커다란 눈과 길고 오뚝한 코, 세상을 향해 당찬 발언을 하고 싶어 하는 입술을 가진 열두 살 소녀였다”고 소개한다.

러시아제국이 폴란드를 지배하던 시절에, 로자는 ‘사회주의’를 접하고, 열다섯 살에 이미 자신처럼 “모욕당하고 공격당한 사람들과의 연대는 절대적인 명령이자 실존적인 필연”이라고 믿었던 로자는 모범생 놀이 대신에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다. 불법지하조직인 ‘프롤레타리아당’에 가입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탐독하며,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인생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차르 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녀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한 열여덟 살이었다.

그녀가 <폴란드의 산업적 발전>이라는 박사논문을 취리히 대학에 제출하고 찾아간 곳은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자본주의가 예상과 달리 붕괴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면서 ‘혁명보다 개혁’을 요구하는 수정주의 노선을 채택하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 로자는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는 글을 발표해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도입, 생산과정에 대한 노동조합의 통제, 의회에서의 다수표 획득 등은 그저 “자본주의 질서를 교정하는 한가로운 수선 작업”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뿐 아니라 자본과 노동의 평화로운 협동 가능성을 제시한 푸리에의 생산공동체 팔랑스테르 체제도 싸잡아 비판했다. “쓰디쓴 자본주의의 바다에 사회개량주의의 레모네이드 몇 병을 넣어 이 자본주의의 바다를 사회주의의 단물로 바꾸겠다는 베른슈타인의 생각은 더욱 어리석은 것이며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덜 공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는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로지 혁명의 망치질, 즉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뿐”이라고 단호하게 밝혔다. 그녀가 경험했던 당시의 현실이 너무 폭력적이고 암담했기 때문이다. 로자의 주장을 2019년 오늘의 한국에 적용하는 건 무리가 있다. 지금은 민중의 정치세력화와 민주주의가 충분히 의미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괴테를 읽다가 죽는 법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과 마찬가지로 레닌이 주도하던 볼세비키의 과격한 중앙집권주의도 비판했다. 당 중심주의의 독재성을 간파한 로자는 “정권 지지자들만을 위한 자유,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당원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렇다. 자유, 그것은 언제나 적어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라고 설파했다.

한편 파시즘이 창궐하고, 쇼비니즘이 부상하고, 군국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에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과 자유’를 주장하는 로자의 주장은 좌우양측에서 모두 고립되었다. 전 유럽이 온통 핏속에서 질퍽거리고 있을 때, 독일사민당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하고 나섰다.

로자는 절망속에서 펜을 피 같은 잉크에 적셔 글을 쓰며 고립된 저항을 이어갔다. 수천 명의 독일군인들이 재판도 없이 그녀의 동지들을 때려잡으며 “우리의 로자는 어디 있지?”라고 고함을 질러대는 베를린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망명도 도망도 탈출도 하지 않은 채, 독일 남서부 만하임 43번지 아파트에서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날 것처럼 작은 가방을 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다.

1919년 1월 15일 저녁 9시를 넘기자 군인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욕설과 야유를 퍼붓는 군인들을 잠시 뚫어지게 응시한 뒤, 로자는 도서관에 갈 것처럼 차분히 괴테의 책과 다른 몇 권의 책을 챙겼다. 병사 하나가 로자의 머리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피범벅이 된 로자가 차 안에 던져지자, 장교 하나가 로자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로자의 시신은 돌에 매달려 국경 운하에 버려졌다. 이때 로자의 나이 마흔 여덟이었다.

 

그 사람의 눈빛

로자는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가 장미다.여기서 춤을 추어라!”하고 말했다. 그녀는 마흔 여덟에 죽었으나, 한탄이 없다. 그녀는 ‘그날’을 충만하게 살고 죽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괴테를 읽었고, 오늘은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로자는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전투 중인 길거리나 감옥에서 생을 마치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삶이 그날그날 보여주는 모든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아 즉시 행동했던 여성이다.

그녀에게 삶은 ‘여기’에 있었다고 이화경은 전한다. 넘어지고 자빠진 지금 ‘여기’에서 벌떡 일어나, 혁명의 붉은 장미꽃을 입에 물고 춤추는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이화경은 “로자 룩셈부르크는 언제나 실천의 현장에 있었고, 현장의 한복판에서 살고 죽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현장 바깥 ‘책’ 속에 칩거했다. 그녀가 꿈꾸고 실현하려 했던 혁명을, 나는 몽상했다. 나는 그저 ‘글’로만 혁명을 읽었을 뿐이다.”라고 자책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이화경만의 고민일까. 안온한 사랑 안에 머무는 모든 이에게 숙제로 남아 있는 게 ‘실천하는 사랑’이다.

예수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말을 아꼈다. 가야파와 빌라도에게 항변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미 정해놓은 수순에 따라서 예수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들은 어차피 예수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가야파의 주님과 예수의 압바는 다른 하느님이었다. 그러니 예수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그들과 말을 섞는 것은 시간낭비인 셈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괴테를 읽은 까닭을 알 것만 같다. 괴테는 ‘거룩한 갈망’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현자에게가 아니면 말하지 마라
세속 사람은 당장 조롱하고 말리니
나는 진정 사는가 싶이 살아 있는 것을
불꽃 속에 죽기를 갈망하는 것을 찬미한다
그대를 낳고 그대가 낳았던
사랑을 나눈 밤들의 서늘한 물결 속에서
그대 말없이 타는 촛불을 보노라면
신비한 느낌 그대를 덮쳐 오리

그대 더 이상 어둠의 강박에 매이지 않고
더 높은 사랑의 욕망이 그대를 끌어 올린다
먼 길이 그대에겐 힘들지 않다
그대 마술처럼 날개 달고 와서

마침내 미친 듯 빛에 홀리어
나비처럼 불꽃 속에 사라진다
죽어서 성장함을 알지 못하는 한
그대 어두운 지상의 고달픈 길손에 지나지 않으리”
(괴테, <거룩한 갈망>)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우리의 구세주>

다만 이 사순절에, 가야파 저택에서 베드로와 눈이 마주친 예수의 시선만이 오래 남아 있다. 영성작가 헨리 나웬은 즈베니고로드에서 발견된 루블료프의 <우리의 구세주>라는 이콘을 설명하면서, 가야파의 저택에서 심문을 받던 중에 자신을 배신한 베드로를 바라보던 예수의 눈길을 떠올린다.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8년에 예수승천대성당 근처 어느 헛간에서 발견된 이콘은 머리와 이마의 일부는 지워졌고, 턱과 가슴에 칠한 물감에는 금이 갔다. 아랫입술 밑에서 짙은 겉옷 위로 검은 줄이 가고, 어깨에 걸친 망토와 겉옷도 여러 군데 손상되었다. 나머지 몸체는 완전히 퇴색되었다. 이 정경을 보고 헨리 나웬은 “우리 세상의 폐허를 통해서, 슬프지만 무척 아름다운 얼굴이 우리를 바라본다”고 고백했다.

<우리의 구세주>의 그리스도는 어깨와 가슴을 약간 옆으로 틀고 있지만, 얼굴은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돌아서신 모습이다. 그 모습은 마치 예수님께서 앞으로 가시다가 우리를 보시고, 고개를 돌려 우리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시는 것 같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두 번째로 닭이 울었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루카 22,61)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이 자기의 가장 깊은 존재를 꿰뚫어 보시는 것을 보셨고, 자신의 나약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22,62)고 복음서는 전한다. 그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고, 그분이 돌아가신 연후에 찾아올 사랑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다.

예수는 혁명을 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만 바라보았다. 그래서 예수는 죽어도 죽지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남겨진 것은 절망뿐이었다. 그들은 단지 “어두운 지상의 고달픈 길손”에 불과하였지만, 예수에게는 절망 뒤에서 희망을 낳았다. 그 희망이 제자들의 절망에 빛을 주었고, 그 빛이 남긴 말씀은 “갈릴래아로 가라!”였다. 갈릴래아는 예수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살아 움직이는 땅이며, 가난한 이들이 가난한 채로 ‘행복선언’을 듣는 땅이다. 이 사순절에 그래, 그렇게 다시 시작해야지,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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