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시대의 군중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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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시대의 군중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 이기우 신부
  • 승인 2019.04.29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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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창립 3주년 기념 강연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1

2천 년 전 예수님 주변에도 당시로서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모이곤 했다. 사제직을 통해 종교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던 사두가이파의 억압에 시달리고, 율법을 내세워 지식권력을 행사하던 바리사이파의 위선과 수탈에 지쳤으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로마 제국에 맞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려던 젤로데파의 폭력성에도 동의하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주로 예수님 주변에 모여 들었다. 그분은 주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활약하셨지만 그분의 명성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유다 지방에서는 물론 띠로와 시돈 같은 해안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 데카폴리스 지방에서도 사람들은 몰려왔다.

이 군중이 동의했던 예수님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분의 선택은 세례자 요한이 외치던 이스라엘의 파국에 대한 경고에 담겨 있었다. 기울어가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감지하고 있던 유다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들이 다시 예수님께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 까닭은 파국이 임박한 이스라엘에 대해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며 정의를 요청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파국이 임박한 이스라엘의 대안을 제시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대안으로서 그분은 소외되고 마음이 찢겨진 밑바닥 민중을 찾아다니시면서 공동체를 회복시켜 주셨다. 그 방법이란 질병이나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을 고쳐주거나, 마귀들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제 정신을 차리게 도와주거나,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잔치를 벌이는 방식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보여주셨다. 이것이 그분이 선포하시던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었고, 그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까지 불러모으셨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젤로데의 모함과 빈축 그리고 견제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함과 빈축과 견제의 끝은 죽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에 이르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하느님께서 주신 십자가라고 확신했고,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인 제자들은 물론 군중에게도 이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받으셔야 할 세례라고 여기셨다.

이에 대해 세례자 요한도 말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니까 임박한 이스라엘의 파국이라는 시국관에 있어서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동일했지만, 그 대책에 있어서는 달랐다. 세례자 요한이 요구한 회개는 율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면 족했지만,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회개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일이었고 이를 위한 십자가가 닥친다면 기꺼이 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스라엘에 파국이 임박했다고 외치면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선포하시던 예수님의 메시지에 그들은 동의했고,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에도 열광했지만 대부분은 그분으로부터 도움과 혜택을 받기를 원하면서도 회개하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들이 회개를 미루고 있었던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으로부터 당면한 민족적 과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춘 현세적 메시아로 보고 있기 때문이었고 그분도 이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여지를 철저하게 차단하셨다.

결국 예수님께 기대를 걸던 군중 대다수는 그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한껏 부푼 기대를 걸었으나, 그분이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이라는 두 가지 혐의를 뒤집어쓰고 무기력하게도 십자가형에 처해질 운명에 처하게 되자 사두가이파의 사주와 젤로데파의 선동에 부화뇌동하여 그분의 죽음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소수의 군중 가운데에는 집과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열두 제자들도 있었고, 이스라엘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면서 그분의 복음을 믿고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들을 토박이 지지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방방곡곡에 파견하셨을 때 돈주머니도 여벌 옷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어도 제자들이 생활에 불편없이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토박이 지지자들의 환대와 협조가 있었다.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젤로데파 등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유력한 집단들을 지지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여 들었으면서도 각기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군중에 대해 그분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해석하셨다.

 

사진출처=pixabay.com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었던 청중을 네 부류로 구분하셨다. 첫째는,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이 떨어지자마자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이로 먹히는 운명처럼, 복음에 관심을 두기는 하지만 혜택이나 이익이 없는 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방관자층이다. 우리 사회에도 가톨릭에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언젠가는 성당에 다니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하지만 입교를 마냥 미루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둘째는 돌 위에 떨어진 씨앗이 단단한 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싹을 내기는 하지만 햇볕에 곧 말라버리는 운명처럼,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던 기적의 혜택을 보고자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았던 기복신앙적 군중이다. 우리 교회 안에도 머리로는 알아듣는 척하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깨달음이 없어서 입교를 하고서도 성사생활을 미루는 냉담자층이 적지 않다. 우리 교회에 입교한 영세자 중 80% 가량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도 내리고 싹도 틔우지만 싹보다 가시덤불이 더 빨리 자라기 때문에 숨이 막히고 햇볕을 받지 못해서 결국 말라 죽는 운명처럼,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분을 자신들에게 현세적 복을 가져다 주실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현세적으로도 손해보려고 하지 않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부류가 있다. 즉 교회 안에 머무르고는 있지만 세속적인 가치관과 복음적인 가치관을 동시에 추구하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종교인층이다. 사제생활과 수도생활을 직업으로 삼는 생계형 성직·수도자들과, 주일미사에 참례하기는 하지만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는, 좋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의 운명처럼,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가치관대로 살고자 개인적으로나 사도직을 통해 노력함으로써 교회를 쇄신하고 사회를 정의롭게 변화시키는 열매를 맺는 신앙인들이다. ‘가톨릭 일꾼’ 운동의 지향도 이 넷째 부류가 되려는 데 적중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냉담자들과 세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생계형 종교직업인들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후자가 보여주는 성직주의적 처신이 전자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멀리하도록 만든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교세 통계에 의하면, 교구를 막론하고 주일미사 참석율이 20%대로 떨어졌고,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경우에도 신앙적 열성이 갈수록 식어가고 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불교 같은 다른 종파나 개신교 같은 다른 교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라는 해석이 그나마 위안을 주기는 하지만, 우리 교회 내부 사정이 이런 지경이라면 선교 활동이나 복음화 전망도 밝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작금의 냉담자 대량 발생 사태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과 그 개선에 필요한 전망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전체 역사와 한국 역사 안에서 밝음과 어둠 그리고 빛과 그림자를 구분하고 제대로 인식한 연후에 새로운 교회상을 출현시키기 위한 해석을 해 보고자 한다. 

이기우 신부
서울대교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파견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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