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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것만으로 사랑을 배울 수 없다.<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로버트 엘스버그, 바오로딸, 2007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더 행복하기를 꿈꾼다. 어떤 사람은 더 행복하려고 결혼하고 , 다른 사람은 행복하고자 이혼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열정을 쏟아서 행복을 추구하기도 한다. 특히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우리는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락함이나 젊어 보이는 용모, 물질적 성공을 통해 행복한 삶을 이루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릴 적 나의 행복은 어머니의 온전한 관심과 사랑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칠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고 바로 위 오빠가 내가 태어난 뒤 바로 소아마비에 걸리게 되었다. 난 아픈 손가락이 아닌 탓에 주목받지 못한 딸이었다. 우리 남매는 전라남도 영광에서 자랐는데 부모님은 아이들 교육은 도시에서 시키고 싶으셨던지 거처를 서울로 옮기셨다. 여건이 되는대로 하나 둘씩 서울로 데려가셨으나 나는 마지막까지 시골에 남겨져 일곱 살부터 초등학교 3학년 까지는 조부모님과 살게 되었다.

그후 학교에서 혼나거나 친구와 싸우고 들어와도 일러바칠 ‘엄마’가 안 계셨다. 그 당시 햇볕을 잘 보지 못했고 날씨가 추워지면 눈이 찔리듯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 눈병에 시달렸다. 3학년 후반에는 홍역까지 앓게 되었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서울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이 오르자 나를 괴롭혔던 눈병은 서서히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은 심인성 질환이었다. 어머니의 칭찬과 인정이 중요했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인정에 마음을 쓰며 살았다. 무슨 일이든 남들이 싫은 소리 하기 전에 잘하려고 애썼고 열심히 일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지냈기에 더 좋은 집으로 조금씩 늘려가고 아이들도 잘 키우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 생각했다.

큰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목동으로 분가했다. 그 곳에서 살면 아이들이 잘 자라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아이들을 잘 돌보는데 집중하기 보다는 학원 스케줄에 맞추어 잘 따라가며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그 마음은 나의 이기심이고 욕심이었다. 성숙한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까닭에 따뜻한 엄마가 아니라, 소위 이야기 하는 ‘목동 아줌마’로 어느새 변해 있었다.

생활이 조금 윤택해지던 40대 초반에 사업장 공간을 비워줘야 하는 일을 당하게 되었다. 청춘을 바쳐 일궈온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실이 참담했다. 타인에 의해 나의 행복은 깨어졌다. 그 뒤로 인생은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관계도 어려워졌다.

 

사진출처=pixabay.com

거룩한 행복

어느 순간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방황할 때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고 로버트 엘스버그의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은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산산조각 난 내 영혼이 땅에도 하늘에도 닿지 못하고 표류할 때 앞서간 성인들의 삶을 통해 지혜를 배우고 새로운 인생관을 쓰게 되었다. 물질과 문명이 우리에게 편안함을 줄 수는 있지만 평안함을 주지는 못했기에 영혼의 기쁨을 누리는 성인들의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엘스버그는 이처럼 성인이 되라는 보편적 소명과 온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열망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탐구했고 어떻게 하면 참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 탐색한다. 상실과 고통,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행복이 있는지 성인들의 삶을 통해 알려준다.

행복은 우연적이거나 순간적인 감정적 차원의 즐거움이 아니라 거룩함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되다(blessed)'는 단순한 느낌이나 감정적 즐거움(happy)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과 생명을 나누는 충만하고 온전히 사는 기쁨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인들 가운데 아우구스티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토마스 아퀴나스, 아빌라의 데레사가 있다. 그들은 단순히 옛날에 살았던 인물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가운데 있다. 어떤 성인들은 도로시 데이, 토마스 머튼, 오스카 로메로, 마더 데레사처럼 살았다. 또 어떤 성인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거나 날마다 일상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성인이 된 것은 그들의 탁월한 사랑과 선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균형잡힌 삶을 살았고 유머감각을 지녔으며 연민과 관대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장애물과 어려움을 평온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였으며 모든 것 안에서 기쁨을 찾았다.”

이런 성인들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삶과 조건이 곧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준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가려고 한다면, 우리가 하는 노동과 가정생활 가운데 내 시간과 주의를 요구하는 수많은 필요에 응답하면서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놓아버리는 법 배우기

안소니 드 멜로는 ‘집착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이 없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는 감정의 매달림’이라 하였다. 남편과의 관계가 어려워졌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것도 집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엘스버그는 참행복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제시한다.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재물만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안전과 자기 이미지, 지배하려는 욕구와 자신이 옳다는 지나친 확신으로 가득 차 사람들이 우리를 더 좋게 생각하며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때로는 자신의 비참함에 매달리기도 한다. 상처와 수치스러운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참행복은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상황을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완전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 참으로 감사할 때 우리는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단순히 놓아버릴 수 있다. 어디에도 애착하지 않고 자유로워지면 더욱 가난해질 수 있다. 그 가난은 비움이요 자유이며 단순함이다. 성인들은 이 가난을 통해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모두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바라며 만족하는 데 있다.”

그동안 나에게 성인이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완벽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든 소유를 버리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선택한 특별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자신과 가족을 돌보기에도 버거운 삶이었고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고군분투하면서 성인들을 따르기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성인들은 고통스런 상황을 겪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순간 하느님이 사람들을 저버리지 않으시며 가장 무자비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사랑과 충만한 생명과 행복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심을 발견했다. 성인됨을 배우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랑하는 법 배우기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보다 우리 존재에 더 깊숙이 새겨진 것은 없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삶이 곧 ‘사랑에 이르는 길’이며, 그 여정에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고 또 어떻게 적절히 사랑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된다고 했다.

많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갇혀 안락과 소유와 명성 따위로 둘러싸인 감옥에서 살아간다. 어떤 대상을 붙잡고 계속 움켜쥐려는 소유 본능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에서 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사랑한 대상을 잃게 될 경우 불행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어떤 다른 사람의 마음도 참으로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랑에 근거하는 행복은 너무나 부서지기 쉽다. 복음이 주는 역설 중 하나는 우리가 버릴 때에 참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첫째는 마음과 정신과 힘과 영혼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답하신다. 둘째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같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굶주린 이, 병든 이, 헐벗은 이, 집 없는 이들이 곧 당신 자신이라고 했다. 우리는 먹을 것뿐 아니라 사랑과 보살핌에 굶주려 있다. 우리는 입을 옷이 없어서 헐벗은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을 향한 연민이다. 집이 없다는 것은 건물 뿐 아니라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너희들이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죄인들도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라는 성서 말씀이 내게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가 중요했던 삶의 가치관에서 이웃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랑을 꿈꾸는 것만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우리는 겸손한 행위로 겸손해질 수 있고 사랑의 행위로 사랑할 수 있다.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인의 ‘작은 길’을 따라함으로써 조금씩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작은 길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일상생활의 온갖 자질구레한 일과 만남과 모욕에 사랑으로 응답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은 내게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모든 상황이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터전이 되고 모든 행동과 지향에서 비롯되는 아주 작은 영향력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성인이 되기 위하여

하느님은 우리를 성인이 되라고 ‘개인적으로’ 부르신다. 우리가 흠결이 없고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며 영혼의 기쁨을 누리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초대하신다. 토마스 머튼은 성인다움이란 보다 "풍요로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관심을 가지는 것, 고통과 이해, 공감에 대한 능력, 또한 웃음과 재치, 즐거움의 능력, 삶의 선함과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눈을 떠 드러나지 않는 깊은 진실과 가치를 보게 해 주신다. 삶의 여정에서 많은 역경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큼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있을까 싶다. 내 모든 것이 다른 존재의 도움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감사는 절로 나온다. 그래서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내가 중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다. 하느님의 부르심에도 슬픈 뒷모습을 하고 돌아서지 않을까 생각하니 자신이 없다.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을 자주 묵상하며 끊임없이 나를 비워나가고자 한다.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내게는 먼 미래에 대한 거창한 목표나 청사진은 없다. 지금 듣고 있는 강의를 빠지지 않고 끝까지 마무리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내가 내 손으로 일상을 꾸려 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어려운 상황일 때 많은 이에게 도움 받았듯이 나도 누군가를 돕고 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화연 안젤라
가톨릭일꾼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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