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과 양심의 사도법관, 김홍섭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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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과 양심의 사도법관, 김홍섭 판사
  • 방진선
  • 승인 2019.04.15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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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꼬투리 잡는 건 절대 아님을 해량바랍니다. 뉴스를 보고 양식있는 박지원 의원의 수사(修辭)에 새삼 놀랐습니다. "이발사 집안은 개천?" 상위1% 부유층 판사도 헌법재판관까지 되야 "용이 나는 것. (상위1% 순자산 평균 24억3700만원 / 은행PB고객기준10억원이상VIP, 30억원이상VVIP)
-「박지원 "이발사 딸 이미선 찬성…개천에서 용 나야 희망"」(CBS 김현정의 뉴스쇼, 노컷뉴스 2019. 4.15)

문대통령, "개천에서 용 나오는 사회 만들겠다"(새해 기자회견. 한겨레신문 2019.1.10)

박의원님 !
"용"이 날 필요도 이유도 없는 그저 오순도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개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지요. 

[「박지원 "이발사 딸 이미선 찬성…개천에서 용 나야 희망"」]2019-04-15 | CBS 김현정의 뉴스쇼
◆ 박지원> 그러니까 피장파장은 됐겠지만 어떻게 됐든 국민 정서상으로는 그런 문제가 있었고 사실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어떻게 됐든 전국 이용사회, 즉 이발사협회가 있거든요. 그런데 목포 지역 회장이나 전국 이용사회 회장을 제가 알아요. 아는데 저한테 전화가 와서 이발사 딸이다.
◇ 김현정> 이 후보자가요?
◆ 박지원> 그러니 얼마나 어렵게 사는데 이발사의 딸도 헌법 재판관이 되는 그런 세상이 돼야 될 것 아니냐. 지금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없어지고 그냥 부자들 자제분들이 잘되는데 이러한 것도 국민들에게, 젊은 청년들에게, 청소년들에게 꿈을 주는 것 아니냐.

'정글 자본주의'의 시대, 30억대 주식 재산 운용의 법조인 부부 요란스러운 등장! 헌법재판관 후보의 무지와 연봉 5억이라는 남편 변호사의 적극적인 그러나 씁쓸한 자기 변론들!

"제1장 ‘정글자본주의’의 시대, 진보의 길 찾기
. ‘악마의 맷돌’이 돌고 있다
2. 자본 앞에서 초라해진 ‘법 앞의 평등’"
조국, <보노보 찬가 : 정글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2009년 5월)

"세월은 흘렀건마는 김홍섭 판사가 더욱 그리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존경하는 '사도 법관·도시락 판사’ 김홍섭 바오로 서울고등법원장님(1913-1965.3.16)! 후배 법조인들과 권력 엘리트들의 양심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

"1996년 문화방송국이 300여 명의 법조계 중진들에게 물었다. ‘가장 존경하는 선배 법관은 누구인가?’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는 첫째가 사법부의 독립을 지킨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요, 둘째는 청렴과 양심의 상징 김홍섭 판사였다. 우연이 아니었다. ‘대쪽 검사’로 이름난 최대교 (1901-1992)가 세 번째였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들 3인을 “법조3성(法曹三聖)”이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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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민 끝에 김홍섭은 법조계에 남았다. 마음을 고쳐 그렇게 결정한 이상, 그는 악덕과 불의를 추방하는데 진력하기로 다짐했다. 수년 뒤 그는 형사사건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판사가 되었다. 이권과 재산 문제 등을 주로 다루는 민사사건은 아예 관심 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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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화려한 부활이 도처에서 목격되었다. 깊은 시름 속에서 김홍섭은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이런 악질 모리배들의 눈에는 국가라는 것이 마치 초대형 회사 같이 보이는 모양이다. 그들은 사업하는 재미로 국가를 동업자처럼 상대한다. 과연 국가란 소수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겉치레에 불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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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섭이 판사라는 자신의 직업과 삶에 대해 끝없이 고뇌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씁쓸한 일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딱한 사정은 오십보백보가 아닐까.

그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해 선명하다 못해 투명하였다. 요즘처럼 물욕을 자랑처럼 떠벌리는 세상에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화를 그는 무척 많이 남겼다. 그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고위층이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잘못이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그 자신은 서울고등법원장 시절, 관용차를 청사에 세워두고 도보로 출퇴근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평생 촌지는 물론이고, 일체의 접대와 향응도 사절했다. 개인용도로는 법원의 편지봉투 한 장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 판사의 직무상 양복을 자주 입기는 했지만, 그가 몸에 걸친 것은 헐값에 산 중고품뿐이었다. 신발도 ‘비닐’로 구두흉내만 낸 것, 또는 검정고무신이 전부였다.

그 시절 한국사회는 가난에 신음하였으나 ‘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는 도를 넘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김홍섭도 상당한 사치와 호사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사서 고생하는 바보’가 되기를 그는 바랐다.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항상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펼쳐져 있었다.

훗날 장면 전 총리는 그를 일컬어 ‘사도법관’ 즉, 그리스도의 사도(使徒)와도 같은 판사라고 했다. 김홍섭에게는 과연 수도자의 면모가 뚜렷했다. 그의 사상과 행적을 연구한 학자들이 그의 종교 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김홍섭은 사법부의 독립과 정의의 구현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는 점이다. - - - 좌우익의 대립이 치열했던 그때, 미군정은 수사와 재판에 노골적으로 간여하였다. 이에 맞서 김홍섭은 사법권의 독립을 주장하며 군정당국과 정면충돌했다. 나중에 제2공화국 시절에도 그는 집권층의 실정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권력의 독선과 오류를 지적함에 있어 그는 주저도 망설임도 없었다. 세월은 흘렀건마는 김홍섭 판사가 더욱 그리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승종 교수, "고뇌의 인간 김홍섭 판사" 한국일보 2016.01.24 )

방진선 토마스 모어
남양주 수동성당 노(老)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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