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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목수의 아들이 전한 두 가지 복음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코-53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예수와 같은 시기에 태어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한 특별한 잉태 이야기를 전해준다. 기원전 63년 9월 23일에 태어난 옥타비아누스는 나중에 로마 원로원에서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받은 황제다. 그의 어머니 아티아는 아폴론 신전에서 깊은 잠에 빠져 뱀의 모습을 한 신에 의해 아기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시간에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아내의 자궁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황제가 가져온 복음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마태 1,18)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투스 황제 역시 예수처럼 어머니가 신적 기운을 입어 잉태한 셈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에도 하느님의 아들인 왕이 탄생해 황금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언한다.

“이제 동정녀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와 함께 등장하는 토성의 지배. 높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로운 인간. 그 아이는 나중에 세상을 다스리며, 타락한 철의 시대를 끝내게 하고, 현세에 찬란한 황금의 시대를 가져다줄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사용한 ‘복음’이란 말은 본래 황제의 출생이나 즉위식과 관련된 용어였다. 즉, 로마제국에서 황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메시아의 출현을 ‘복음’이라 부른 것인데, 당시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옷을 입고 등장한 하느님으로 숭배되었다. B.C. 9년 소아시아 도시 연맹(Asian League)은 프리에네(Priene)에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경축하는 다음과 같은 비문을 기록해 놓았다.

“인간을 향한 신의 섭리는 신의 열심을 가지고 아우구스투스를 보내심으로 인생들을 위해 역사적으로 최고 정점의 시간들을 마련해 주었다. 신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해 메시아(구세주)를 보내주었다. 이 메시아(아우구스투스)는 세상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세상의 모든 것을 평화로운 상태로 만들었다. 그가 세상에 등장함으로 이전에 우리 앞에서 ‘복음’ 을 주었던 모든 사람이 주었던 소망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그는 그 앞에 존재했던 은인들보다 더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올 어떤 사람도 그가 준 소망보다 더 뛰어난 소망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위한 그의 업적 때문에 ‘복음의 시작’은 그 신의 생일날(9월 23일)이 되어야 한다. 아시아에서 스미르나가 칙령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생일로 우리의 인생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준 행운과 그가 우리에게 준 구원 때문에 아시아에 있는 헬라 도시들은 새해의 시작은 아우구스투스의 9월 23일로 시작하기로 칙령을 내린다.”

 

사진출처=pixabay.com​​

목수가 전한 복음

이처럼 로마와 소아시아 백성들이 아우구스투스 로마황제를 메시아이며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탄생과 그분 자신, 그분의 말씀과 행적 모두를 ‘복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이 세상의 시작이라는 메시지에 도전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기뻐한다.

결국 예수와 아우구스투스는 출생의 시기와 과정이 엇비슷하며, 평화의 왕으로서 복음을 만방에 전해 줄 신의 아들, 메시아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그들을 추앙한 사람들은 제가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로마와 그 식민지의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은 아우구스투스를 따랐겠지만, 식민지 통치아래서 고난 받던 백성들은 예수를 선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예수의 부모는 가난한 노동자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삼켜 성공한 황제로 천수를 다 누렸으나, 예수는 뼈저린 적빈(赤貧)의 처지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결국 세력가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극형을 당한 실패자로 요절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대로 세상을 평정했지만, 예수는 제자들마저 달아난 상태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갈망하는 모든 것을 다 소유했지만, 한 사람은 단벌옷마저 빼앗긴 채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 출생의 비밀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이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고, 황제를 주님으로 숭배했던 자들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예수처럼 외롭지만 고단한 길을 잠잠이 걸어갔다. 심지어 시몬느 베유는 그리스도교를 ‘노예의 종교’라고 말했다.

칼 마르크스는 <헤겔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을 상실해버린 현실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일이었다. 주는 대로 읽는 게 아니라, 바로 두루마리를 펴고 이 구절을 찾아서 읽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분은 가난한 이에게 ‘먼저’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하는 게 당신의 사명임을 밝힌 것이다. 게다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니, 회당에 모여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기득권층에서 예수를 벼랑으로 데려가 죽이려 들었던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복음에 매료된 교황,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불러일으키는 최선의 동기는, 복음을 사랑으로 관상하고 조금씩 찬찬한 마음으로 읽는 것”이라며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을 읽을 때마다 거듭 매료된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온 생애, 가난한 이들을 대하시는 그분의 방식, 그분의 몸짓, 그분의 한결같음, 그리고 소박한 일상에서 보여주신 그분의 관대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의 완전한 봉헌, 이 모든 것이 소중하고 우리 인간의 삶에 말을 건넨다.”고 전한다. 이처럼 복음은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전한다. 복음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남루한 백성들의 상처를 싸매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한 소식을 통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복음의 시작을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서 시작할 것인가?” “아우구스투스의 운명을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운명을 사랑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 하느님의 아들을 황제의 모습에서 찾는가,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찾는가?”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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