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징표에 응답하는 교회: 김수환 추기경 "나를 밟고 지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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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징표에 응답하는 교회: 김수환 추기경 "나를 밟고 지나가라"
  • 한상봉
  • 승인 2019.04.0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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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코-52

교회가 성령의 힘에 사로잡혀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기로 작심하고, 교회 자신과 세상의 복음적 변혁을 위해, 교회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 교회 안에 ‘신선한 세상의 바람’을 불어넣고,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맛보려고 변신을 시도한 가장 탁월한 역사적 사건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였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자신의 사목적 청사진을 제시한 <복음의 기쁨>은 공의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 교종의 성령에 의한 교회 개혁 의지를 담고 있다.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앞두고 발표한 소집서한에서 “이번 공의회는 교리나 교회법을 다루지 않고 먼저 세계의 문제와 교회를 바라보되, 시대의 징표에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고 밝혔다. 교리논쟁이 아니라 사목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1962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식에서 교종은 “교회의 가르침이란 박물관의 보물처럼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탐구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제 교회는 세상을 단죄하고 가르치는 심판관이 아니라,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갖고 어머니다운 모습을 가져야 하며, 이제 모든 신자가 일치하고, 다른 교회와 일치하고, 모든 종교와 일치하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이 공의회가 “성령의 갑작스러운 이끄심”에 의한 것이었다며, 공의회 회기를 시작할 때마다 세비야의 주교학자 성 이시도로가 지은 다음 기도문을 바쳤다.

“당신의 이름으로 특별히 결합되어 모인 우리에게 오사
우리와 함께 하소서.
우리 행동의 인도자가 되사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시고, 해야 할 바를 일러 주소서.
당신의 도우심을 입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당신 뜻에 들게 하소서.
우리 머리를 당신의 영감으로 채우사
우리가 의도하는 바를 바로 잡아 주소서.
당신은 홀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빛나는 이름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끝없이 정의로우신 분이시니,
우리로 하여금 정의를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지로 말미암아 악으로 기울지 말게 하시고,
아첨으로 인하여 동요되지 말게 하소서.
물욕에 더러워지지 않게 하소서.
우리 마음을 강한 힘과 은총으로 당신과 하나 되게 하사
무슨 일을 하든 진리에서 벗어나지 말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으로 결합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자비와 정의를 따라 판단함으로써오늘도 우리의 행동이 당신 뜻에 맞갖게 하사
영원히 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한국 교회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직접적인 영향은 1966년 3월 5일, 김수환 신부가 마산교구장에 착좌되고,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이기도 했던 김수환 주교가 1969년 3월 28일, 추기경으로 서임된 사건이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추기경 서임 직전에 미국 보고타에서 새로 서품된 사제와 부제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당부했다.

“주여, 여기 있는 새 사제와 부제들을 보소서... 우리는 주께 기도드립니다. 그들의 봉사와 그들의 모범으로 이 지방에 가톨릭신앙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빛이 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이 빛이 활동적이고 너그러운 사랑으로 반사되게 하소서. 그들의 증거는 주교들의 증거를 따르고 동료들의 증거를 강화하며, 하느님 백성의 참된 신앙생활을 길러줄 줄 알게 하소서. 명철하고 용감한 정신으로 사회정의를 진작시키며, 빈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며, 복음적 사랑의 힘과 어머니요 스승인 교회의 지체로써 현대사회의 요구를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사목> 1968년 11월 9-14 페이지 참조)

 

유신정권에 맞서는 영적 지도자, 김수환 추기경

당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정에 충실히 응답한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교회에 내려진 축복이었다. 주교와 사제 등 성직자의 자기변혁을 촉구했던 흐름은 결국 한국 교회가 유신정권에 맞서는 영적 힘으로 작용했다.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구속사건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탄생시켰고, 김재덕 주교와 두봉주교, 윤공희 대주교 등이 이들 사제들을 지지하고, 배경이 되어 주었다. 교회가 가장 활력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던 시절이었다.

가장 위급한 시절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집권당인 공화당이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례조치법’을 국회에 제출하여 통과시키려고 했을 때,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한국교회 주교단은 그해 12월 13일부터 왜관 피정의 집에서 정기총회를 열고 1972년을 ‘정의평화의 해’로 선포했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교구와 본당에서 사회정의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사업을 위해 주교회의에 설치된 ‘사회정의추진위원회’ 위원장을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맡았다. 그해 성탄절 메시지를 통하여 김 추기경은 “이 법은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라고 항의하며 ‘국가보위에 관한 특례조치법’의 반민주적 성격을 비판했다.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를 주장하며 양심선언을 하고 구속되자, 한국 주교단은 ‘1975년 성년 반포에 즈음하여’(1974.7.5)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여 사목자들이 사회정의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범교회적 차원에서 교육하고 선전할 것을 촉구하였다.

“성년은 예로부터 ‘하느님을 위한 해, 인간을 위한 해, 세계를 위한 해였고, 특히 가난한 사람을 위한 해였습니다’ ...... 때문에 교황은 ‘쇄신과 화해의 호소는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자유와 정의와 일치와 평화에 대한 가장 절실한 소망과 합치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먼저 이웃 사람과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개인과 단체와 국가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기본 권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때문에 사회정의를 가르치고, 사회문제 각성에 대한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며, 모든 인간의 기본권을 거듭 강조함은 교회의 의무와 책임이며,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인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책임입니다. 우리들은 성년동안 모든 신부들과 전교를 담당하는 수도자, 교리교사들이 강론 혹은 교리교육에,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회교의와 교황들의 회칙을 가르칠 것을 당부합니다.”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주교단의 담화문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발언을 ‘국민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라는 제목으로 <사목>지에 기고하였다. 이 글은 특히 불의에 도전하는 양심세력의 신장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정권담당자들의 사리와 아집이 아니고 민주적 양심세력의 신장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는 부당하게도 양심세력이 봉쇄당하는 비극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용납하시지 않는 불의이다. 오늘 우리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자기를 바침으로써, 이 불의를 해소하는 일에 부름받고 있다.” -《사목》 1975.1

전두환 정권 때에도 김수환 추기경이 머물던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였다. 명동성당 들머리에는 늘 도시빈민들의 농성장이 들어서고, 노동자, 농민들이 김 추기경을 찾아가 지지와 지원을 호소했다. 당시 명동성당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성토하는 ‘아고라’(agora)였던 셈이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명동성당은 학생들과 시위군중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성당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며 학생들에게는 각목과 화염병을 버리라고 이야기하고, 경찰도 최루탄을 쏘지 말라는 요구하며 사태수습 방안으로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찰의 강제진압 결정을 통보하러 온 정부 고위당국자에게 김수환 추기경은 역사에 남을만한 말을 건넸다.

“제가 하는 말을 정부 당국에 전해주십시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찾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그러나 한국교회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지난 30년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불러왔던 신선한 활력은 점차 가라앉고 말았다. 급기야 교황직 사임으로 낡은 창문을 닫고 프란치스코 교종이라는 새로운 창문을 열어주었던 베네딕토 16세 교종은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전후해 ‘신앙의 해’를 선포하고 ‘신앙쇄신’을 다시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어 프란치스코 교종은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 그 물꼬를 더 분명히 열어주었다. 이 역시 요한 23세 교종이 50년 전에 밝혔던 것처럼 “성령의 갑작스러운 이끄심”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영감의 바탕이 된 예수는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교황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영에 따라 살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 신앙실천에 뚜렷한 차이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전한 복음이 누구에게 ‘기쁜 소식’인지 알아야 교황이 요청하는 ‘복음화’의 가닥이 잡힐 것이다. 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씌어졌다는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자칫 복음이라는 말이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처럼 들린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예수 이전에 또 다른 복음이 있었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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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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