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월산에서 무위당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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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월산에서 무위당을 만나다
  • 김유철
  • 승인 2016.05.2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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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ven's door
사진 출처/http://hansalimin.tistory.com/

좁쌀 한 알이 되어 땅으로

무위당 장일순은 원주땅을 품고 있는 치악산을 모월산(母月山)이라 부르고 그렇게 새겼다. 선생은 그 산을 어미의 심정으로 품어주는 보름달로 바라보았던 모양이다. 그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것을 ‘한살림’이라 불렀다. 후학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해 나가는 동안 그는 단지 묵묵히 난꽃을 먹으로 쳤을 뿐이다. 일없이 일을 하는 무위(無爲) 세상의 조화로움을 위해 활짝 문 열고 아래로 기어가는 것을 그의 삶으로 삼았다. 밑바닥 사람-깨진놈-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에게 밑바닥 사람은 하늘이었다. 그는 낮은 울타리가 되어주는 사람이었다. 이내 그는 ‘좁쌀 한 알’ 되어 땅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땅은 다시 하늘이었다.

2015년 9월 교종 프란치스코가 미국의회를 방문하여 위대한 미국인으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마틴 루터 킹 목사, 가톨릭일꾼 도로시 데이, 트라피스트수도회 토마스 머튼 수사 등 4명을 거론할 때 “우리에게는 장일순 요한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성장개발’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고 모두가 외눈박이가 되어갈 때 선생은 “경쟁이 결코 우리의 길이 될 수 없다”며 ‘共生是道’(함께 사는 것이 인간도리)라 했다.

그는 청소년을 위한 교육과 농업, 축산업을 위한 교육 및 노동자와 영세민을 위한 신용협동조합 사업을 전개하며, 도농 모두가 사는 ‘한살림’을 시작했다. 그것은 온 천지 모두가 더불어 사는 생명평화운동의 시작이었다. 서로를 지극정성으로 ‘모시자(侍)’며 펼쳤던 교육과 사업과 운동들은 그 자체의 중요함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것’이었으며, ‘조화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무위당의 목소리를 듣다

선생이 이 땅을 떠난 지 22주기를 맞아 마침 보름달이 환하던 날 원주를 다녀왔다. 소초면 선생의 묘소에서 열린 작은 추모행사에서 주최 측은 살아생전 그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아마 어느 언론과 인터뷰 하는 것을 녹음해 두었던 모양이다. 익히 알던 그의 목소리가 묏등에서 나와 가슴을 파고 들었다. 문득 누워있는 선생에게 무언가 물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천국의 문을 두드리듯 선생의 묘에 절을 올리면서 살짝 땅속으로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의 낮고 울림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쪽에서 천주쟁이가 왔구먼. 오랜만이야. 나 역시 천주쟁이지만 교회 안보다는 교회 밖에서 훨씬 더 많이 예수를 만났어. 그리고 예수가 만나던 깨진 놈들을 원주역 앞이나, 원주천 뚝방 길에서 두루 만났지. 내가 친 난 그림 보면 알겠지만 누운 풀, 다시 일어나는 풀 속에서 예수가 ‘아빠’라 부르던 하늘모습을 번번이 만나곤 했어.

이곳 원주는 해월 최시형 선생이 동학을 전하다가 1898년 체포되어 유명을 달리한 인연이 있는 곳이야. 그 이전에 한 가지 알아둘 것이 있어. 해월선생이 체포되기 전인 1893년 우리 역사 최초로 충북 보은에서 민회(民會)가 열리거든. 요즘 말로 저항권을 선언하는 시민촛불집회가 되겠지. 그것이 이른바 ‘보은취회’일세. 결국 그 기운이 모여 그 이듬해 동학혁명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거야. 결국 민중의 깨달음을 밑바탕으로 민족종교라 일컫는 천도교, 원불교 등이 100살을 넘기고 있는 걸세.

그건 그거고 암튼 그보다 앞서 서학이라는 천주학을 하던 사람들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다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으니, ‘동’이니 ‘서’니 하는 것이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어찌 보면 위험한 사상이었던 모양이야. 허기는 ‘남’과 ‘북’은 더 큰 위험이나 위협이겠지. 한마디로 그런 이분법적 사고와 관계론이 아닌 배타론은 그저 어리석은 일들일세.

자네가 천주쟁이라니 이 기회에 그 집 이야기를 좀 하세. 자네들 교회의 묵은 속살이 요즘 교종 프란치스코 덕분에 많이 들어나고 있더군. 쉽지 않은 일,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일을 그 분이 하고 있어.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더군. 머잖아 그 분을 내가 여기서 직접 만나겠지만 미리 누가 내가 쓴 비뚤한 글씨라도 하나 선물로 주었으면 좋겠어. ‘자네가 나였다’는 글이 어디 있을거야. ㅎㅎ.

ⓒ장일순

그 분이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그곳을 다녀가더군. 내가 보니 모두가 감동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어. 누군가에게는 삶의 이정표가 달라지기도 했지만 다른 무리들은 그 분의 발걸음을 위험하게 보더군. 하는 짓들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오래전 내가 아직 그 땅에 있을 때 요한 바오로 2세가 그 땅을 처음 왔었지. 그 때 지학순 주교가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어. 내가 원주교구 평협회장인가 뭐신가 할 때였어. 그러나 나는 일언지하에 안 간다고 했어. 지 주교가 놀라더군. 그래서 내가 그랬어. 교종이 -당시는 당연히 교황이라고들 불렀지- 정말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면 저렇게 요란하게 안 올 텐데요, 그랬어. 암튼 지 주교는 혼자 가서 그를 만나고 오더군.

교회사는 신앙사(信仰史) 일세

당시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식을 하러 그곳에 왔지만 한국천주교회는 200주년을 요란하게 내세우고 각종 행사를 했었지. 조금 이상한 이야기지만 왜 그 해가 200주년인지 한번 돌이켜 볼까? 한국천주교회는 자신들의 기원을 공식적으로 1784년으로 잡고 있는 모양인데 아마 그것은 그 해 봄 이승훈선생이 중국 북경본당에서 세례를 받은 해이지. 여기서 자네는 교회역사란 ‘신앙사’이지 ‘영세사’가 아닌 걸 빠트려서는 안되네.

한국천주교회는 지금도 ‘선교사 없이 평신도로 시작했다’는 것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 받은 것을 기원으로 삼는다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첫 세례자가 중국에서 돌아와 공동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신앙공동체가 있었고, 그 공동체가 20대 초반의 이승훈을 ‘파견’한 것에 대해 짐짓 눈감고 있는 것을 나는 안타깝게 생각하네. 교회성립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교회사학자든, 교의신학자든 학자들이 목을 내걸고 토론해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아야 할 일이야. 자네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 한 번 여기에 대해서 써보도록 해. 글은 울림이야. 울림이 있는 글을 한 번 써봐. 찌질하게 쓰지 말고.

한 가지 이것에 보탤 말이 있어. 그 때 왔던 요한 바오로 2세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로마로 돌아가서 한 말이 대단해. 정말 놀랄 말인데 자네들은 한 귀로 흘리고 있어. 그러니까 1984년 10월 14일 로마 성 베드로대성당에서 열린 한국순교성인 103위 시성 경축미사 강론에서 이런 말을 해.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서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된 것입니다. 신앙을 향한 한국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말 고맙게도 몇몇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이 평신도들을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성직자 없이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렇게 말했어. 자네 무슨 생각이 드는가? 좀 미안하지? 무언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지?

믿을 일이 아니라 살아야 할 몫

죽은 사람이 산사람의 말로 말하려니 나도 힘이 드네. 한마디만 더 하고 이제 다시 제자리로 가려하네. 교종 프란치스코가 2014년 다녀가고 한국이 바뀌었나? 아니 한국천주교회가 바뀌었나? 바뀐 게 없으면 그 사람이 다녀간 게 아니겠지. 아마 그것은 자네들의 환각이거나 환상일거야. 내가 그곳을 지금도 수시로 찾아가듯이, 예수 그 양반도 자네들의 삶이 바뀔 때 그곳에 비로소 부활할걸세. 예수는 부활절에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365일 매일, 매순간 자네들의 삶에 있네. 그것은 믿을 일이 아니라 살아야 할 자네들의 몫이네. 오늘 보름달이 참 좋네. 이제 막걸리 한 잔 마시세.”

무위당 장일순과 그렇게 만났다. 모월산 위에 뜬 보름달을 자비로운 손길로 느끼며 수첩에 무엇인가를 한가득 적었다. 눈가에 눈물도 한가득 고였다. 천국의 문은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니었다.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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