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슬픔, 하느님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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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슬픔, 하느님의 슬픔
  • 한상봉
  • 승인 2019.02.1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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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학창시절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마음으로 아예 떠나보낸 두 명의 작가가 있다. 김지하와 이문열이다. 김지하의 모든 시어가 내 영혼을 열뜨게 만들었다. 굳이 <타는 목마름으로>나 <황토길>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그의 후기 시어인 <애린> 연작시도 마음에 와서 닿았다. 더구나 <남녘땅 뱃노래>나 <밥>은 혁명과 시를 통합시키려는 갈망을 낳았다. 이제는 시인도 사상가도 아닌, 동학도 가톨릭도 아닌 김지하를 아프게 언 땅에 깊이 묻었다.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나의 소박한 생각을 언 땅에 묻어버렸다.

고3, 입시준비를 하며, 예수고난회 성소자 모임에 나가던 때였다. 수학 과목을 포기한 뒤로 수업시간에 책갈피에 소설을 껴서 읽었다. <어둠의 자식들>, <만다라>, <사람의 아들>. <만다라>(한국문학사, 1979)에서 지산 스님은 절집에서 나무부처를 깎았다. 그 얼굴이 하도 일그러져 흉측한 부처를 보고 법운 스님이 묻는다. “부처 얼굴이 왜 이래요?” 파계승이었던 지산이 답한다. “중생들이 모두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부처인들 온전할 수 있겠나?”

부처란 모름지기 고통 받는 중생과 더불어 고통 받고, 슬퍼하는 중생과 더불어 슬퍼한다는 말이다. 신학자 칼 라너는 하느님을 ‘근심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몰트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어갈 때 하느님도 함께 고통 받고 죽었다고 말한다. 누군가 후미진 골목에서 울먹이고 있을 때 하느님도 그와 더불어 가슴을 찢고 계시다는 전갈이다.

의인을 위한, 사람의 아들

이문열 소설 <사람의 아들>(민음사, 1979)은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민요섭의 일기를 보여준다. 신학생이었던 민요섭은 나환자촌에서 돌아와 이렇게 썼다.

“어찌하여 선악을 불문하고 인류에게 재난이 닥쳐오는가. 부유한 자, 힘센 자, 권세 있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무(無)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세상에서는 전부인가. 가난한 자, 병든 자, 버림받은 자는 예수님 말씀에서는 전부였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어찌하여 무(無)인가. 세상은 믿기 위한 미신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종교야말로 그 같은 미신의 가장 기교로운 형태가 아닐는지.”

민요섭이 남긴 원고뭉치가 있었다. 아하스 페르츠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소설에서는 아하스 페르츠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아하스 페르츠가 메마른 바위산 기슭에서 만난 청년은 긴 묵상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얼굴은 덥수룩한 구레나룻과 흐트러진 갈색 머리칼로 덮여 있었으나 방금 뜬 두 눈은 갈릴래아 호수보다 맑고 푸르렀다. ‘이 세상을 구원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청년에게 아하스 페르츠가 묻는다.

“지금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이오. 당신은 이 돌덩이를 빵으로 만들 수 있소? 다시는 저들이 빵이 모자라 고통 받는 일은 없도록 해줄 수 있으시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소. 성서의 오랜 기록이니, 흙에서 빚어져 필경 흙으로 돌아갈 육신은 한 덩이 빵으로 기를 수 있지만, 내 아버지의 입김으로 불어넣어져 그분과 함께 영원할 영혼은 오직 그분의 말씀으로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오. 내 아버지의 크고도 깊은 사랑을 단순한 물질적인 은혜로 끌어내리려 하지 마시오.”

“그렇소? 여전히 그분의 뜻은 그러하오? 저들이 겪어온 그 오랜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오? 결핍과 갈구만이 저들 육신의 영원한 숙명이란 뜻인가요? 그 육신이야말로 저들 존재의 가장 뚜렷한 증명이며, 영혼을 헛되이 떠도는 망령의 신세에서 구해 주는 것. 하나하나로서는 덧없는 생사의 반복에서 헤어날 길이 없지만, 전체로서는 저처럼 면면한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건만...”

“영혼의 삶이 더 크기 때문이오. 당신이 아무리 그 귀중함을 과장한들 바람 앞의 겨와 같고, 풀잎 위의 이슬 같은 육신의 삶이 저 영원한 참 생명에 비해 무엇이겠소? 거기다가 이제 약속의 날도 가까웠소. 머지않아 주린 자는 채우게 될 것이고, 목마른 자는 적시게 될 것이오. 어찌 그들의 결핍과 그로 인한 고통이 영원일 수 있겠소?” 아하스 페르츠의 마지막 말은 더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아, 그 가혹한 심판의 날 말인가요? 그날에 웃을 몇 안 되는 그 ‘의인들’ 말인가요? 하나를 위해 아흔아홉이 불에 던져져야 하는 그 재앙의 날에...”

이런 이야기들은 내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인정머리 없는 하느님

나는 내가 ‘주님’으로 고백해 온 그 분이 누구신지 그때까지 잘 알지 못했다. 교리문답에서 배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대자대비하신 분이었다. 허나, 그분을 또렷이 알기 위해 성경을 다시 읽기로 했다. 아직 신학에 입문하기 전, 입시생이었지만.

구약의 첫 권 <창세기>부터 앞이 캄캄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먹음직한’ 열매를 따먹은 죄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산통과 고역을 치르며 살고, 심지어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통 받고 “언젠가 죽으리라.”는 선고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 되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사전경고도 없이 단 한 번의 실수를 추방과 고통, 죽음으로 앙갚음하신다. 무소부재하신 하느님은 더 이상 아담과 하와 앞에 현존하지 않는다. 이처럼 교리문답 답안지가 찢어지면서 나는 당혹감에 흔들렸다.

구약을 덮고, 신약의 첫 권 <마태오 복음>을 읽었다, 좀 다르겠지, 하며.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고, 드디어 예수님이 탄생하시는데, 헤로데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미만 아기들을 모두 학살하고, 예수님의 가족만 이집트로 달아난다. 어떻게? 하느님 명령으로 천사가 미리 요셉에게 귀뜸해 주었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니까.

애꿎은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불쑥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귀한 줄 알면서 남의 자식 귀한 줄 모르시나.” 하는 반감이 생겼다. 성경을 읽다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이 막다른 골목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너무 놀랐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두려웠다. 결국 신앙이야 근근이 보전했지만, 수도회와 신학교는 물 건너갔다, 납득할 수 없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비열한 그분을 사랑할 수 없었으니까.

우리와 함께 슬퍼하는 하느님

나중에 깨달았다. 사람은 역시 공부를 좀 해야 한다. 학생운동 하면서, 신학공부 하면서,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을 접하면서, 이런 고민이 나를 위한 그분의 배려임을 알았다. 민중신학자들은 ‘공(公)의 신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무는 동산 한가운데 있었다. 동산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이다. 그 열매를 누군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평등하게 누려야할 공유물이다.

가톨릭사회교리에서도 절대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모든 재화는 공동의 소유라고 말한다. 이걸 특정인이 제 것으로 독점할 때 다툼이 생기고, 다툼이 사회적으로 확장되면 전쟁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다. 탐욕은 독점을 낳고, 독점은 전쟁을 낳고, 전쟁은 죽음을 낳는다. 여기에 평화는 없다. 만인이 평등평화를 누리는 희년에 반대되는 일이 에덴에서 일어난 것이다.

유대의 독점적 소유자였던 헤로데는 반역을 용납하지 못한다. <마태오복음>에서 그는 죄 없는 아기들을 학살하고, 그중 하나였던 예수님은 난민이 되어 객지를 떠돌았다. 그분은 한평생 이런 불의와 비참을 종식시키기 위해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죄 없이 죽은 아기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벌거벗은 채, 창에 찔린 채, 죄 없이 권력자에게 살해당했다. 그동안 그분은 굶주리는 사람들 앞에서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처럼 ‘영성’과 ‘종교’를 선포하며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그분은 “빵보다 말씀을” 강조했지만, <루카복음>에서 짐승의 거처에 짐승의 먹이로 오셨고, 한사코 사람들과 빵을 나누었다. 그분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잔치였기에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고, 목마른 이들이 입을 적시며, 슬퍼하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기로 마음먹고, 죄인들의 식탁에 앉아 그들을 축복했다.

그분은 단 한 번도 가난한 이들과 여인과 아이들을 비난하시지 않았다. 그들이 착해서가 아니다. 목자 없는 양떼 같이 가엾은 이들에게 온통 마음이 쏠리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인이기 전에 희생자였다. 그분은 당신 스스로 죄인이며 희생자로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써 죄인들에게 ‘죄 없다’ 하시고, 희생자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되돌리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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