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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아들의 부서짐은 예수님의 부서짐이다[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12] 작은 아들의 귀환-4

나는 여기에서 신비에 닿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탕자가 되었다는 신비이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외국 땅에 와서 가진 모든 것을 버렸으며,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이 모든 것을 그분은 반항하는 아들로서가 아니라 순종하는 아들로서 했고, 하느님의 모든 잃어버린 자녀들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묘사한 길고도 고통스러운 여정을 직접 살았다.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아들의 귀환은 예수님의 귀환이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와 렘브란트의 그림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지친 젊은 청년을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의 얼굴로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시간을 깊고 내밀한 관상으로 보낸 뒤, 나는 이러한 비전을 보게 되는 축복을 느낀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무너진 젊은 청년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이지 않는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된 무죄한 분은 바로 그가 아니었는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필리 2,6) “우리와 같은 인간 존재가 된”(필리 2,7) 분은 바로 그가 아니었는가.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하고 울부짖었던 죄 없는 하느님의 아드님은 바로 그가 아니었는가. 예수님은 방탕한 하느님의 방탕한 아들로서 아버지가 그에게 맡긴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럼으로써 내가 그분과 같게 되고 그분의 아버지 집에 함께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을 바로 탕자로 보는 것은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을 훨씬 뛰어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각은 커다란 비밀을 간직한다. 나는 점차적으로 나의 아들됨과 예수님의 아들됨이 하나이고, 나의 귀환과 예수님의 귀환이 하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발견해가고 있다. 예수님이 갔던 여정 이외에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은 없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전한 존재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분을 통하여 세상이 생겨났다”(요한 1,10). 그분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그리고 우리를 그분의 충만함에 참여케 하였다.

신앙의 눈으로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면, 탕자의 “돌아옴”은 모든 사람들을 그분께로 모아들이고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집으로 데려가는 하느님의 아드님의 귀환이 된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시고,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다”(콜로 1,19-20).

버려진 채 버려진 이들과 더불어 아버지에게로

예루살렘 시에서 살고 있는 수도승들의 공동체 예루살렘 형제회의 창설자인 피에르 마리 신부는 매우 시적이고 성서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돌아온 아들로 성찰하고 있다. 마리 신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물질이나, 인간적 욕망 혹은 인간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은 그분은 오로지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태어나, 어느 날 당신의 발아래 있는 모든 것을 모아들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지위를 상속으로 갖고, 모든 희생의 값을 지니고 떠났다. 그분은 먼 나라를 향해 갔다. … 멀리 떨어진 땅으로 … 그곳에서 그분은 인간존재가 되었고 그분 자신을 비웠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분의 첫 번째 침상은 짚으로 만들어진 침상이었다! 척박한 땅의 뿌리처럼, 그분은 우리 앞에서 자라났고, 사람들 중에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멸시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분 앞에서 얼굴을 가렸다. 얼마 되지 않아, 그분은 추방, 적대감, 외로움을 알게 되었다. …

모든 것을 풍요로움의 생명 속에 던지고 난 후, 그분의 가치, 그분의 평화, 그분의 빛, 그분의 진리, 그분의 생명 … 지혜와 지식과 감춰진 신비의 모든 보물이 끝없는 세월 속에 비밀로 있었다. 그분 자신을 이스라엘 집안의 잃어버린 자녀들 속에서 잃어버린 후; 그분의 시간을 병든 이들(그리고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고)과, 죄인들과(그리고 올바른 이들과 함께 하지 않고), 심지어 그분의 아버지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약속한 창녀들과도 시간을 보내면서; 대식가요 주정뱅이로,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사마리아 사람으로, 마귀 들리고 신성 모독을 하는 자로 취급받은 후; 그분 자신 안에서 슬픔, 고뇌, 그리고 영혼의 시달림을 깊이 느낀 후;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그리하여 생명수의 원천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로 그분 자신을 스스로 표현한 후, 그분은 못 박혀 있는 십자가로부터 울부짖는다: “목마르다.”

그분은 티끌 속에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 속에 쉬기 위하여 뉘여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 모두의 범죄를 짊어지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견디며, 우리의 슬픔을 대신 지고서 내려갔던 지옥의 심연으로부터 일어난다. 꼿꼿이 서서, 그분은 외친다: “그렇다, 나는 나의 아버지요 너희의 아버지이며, 나의 하느님이고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분은 하늘나라로 다시 올라간다. 그러자 침묵 속에서 아드님과 그분의 모든 자녀들을 바라보고 있던 하느님은, 아드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었으므로, 하인들에게 말한다, “빨리!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혀라;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그의 발에는 샌들을 신겨라; 우리 모두 먹고 기뻐하자! 왜냐하면, 너도 알다시피, 나의 아이들이 죽었었고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잃어버렸으나 다시 찾았다! 나의 돌아온 아들이 그들 모두를 데려오고 있다.” 그들은 모두 긴 옷을 입고, 하느님의 어린 양의 피로 하얗게 씻고 잔치를 하기 시작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그림을 다시 보면서, 나는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아들을 본다. 나는 그를 그분의 아버지요 나의 아버지이고, 그분의 하느님이요 나의 하느님께 돌아가는 예수님으로 본다.

렘브란트 자신이 돌아온 아들을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보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는 렘브란트 시대의 설교와 저술의 전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치고 부서진 젊은 청년을 예수님 자신으로 보는 것은 많은 편안함과 위로를 가져다준다.

아들은 인류 전체,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얼굴

젊은 청년, 아버지가 끌어안은 그는 더 이상 단순하게 회개하는 죄인 하나가 아니라, 하느님께 돌아가는 인류 전체이다. 탕자의 부서진 몸은 인류의 부서진 몸이며, 돌아온 아이의 애기 같은 얼굴은 잃어버린 낙원으로 다시 들어가기를 염원하는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얼굴이 된다. 이처럼 렘브란트의 그림은 감동적인 비유를 단순하게 그린 초상 그 이상이 된다.

그림은 이제 우리 구원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을 둘러싸고 있는 빛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말한다. 그림은 요한의 장엄한 말을 기억하도록 요청한다:

“…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3,2).

그러나 렘브란트의 그림도 또한 비유도 우리를 그냥 황홀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시몬느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포스터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포옹하고 있는 그림의 중심부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네 명의 방관자들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돌아옴”을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의 얼굴을 알고 있다. 그들은 아무리 줄잡아 말하더라도, 수수께끼이다. 특히 그림의 오른편에 서 있는 키 큰 남자는 더욱더 수수께끼이다.

그렇다, 그림에는 아름다움이, 영광이, 구원이 있다… 또한 어느 편도 아닌 방관자, 구경꾼들의 비판적인 눈들이 있다. 방관자들은 영적인 화해의 문제에 대하여 빠르고 낭만적인 그 어떤 해결책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그림에 제재를 가하고 있다. 작은 아들의 여정은 그의 형의 여정으에서 분리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약간 무모하게 나의 관심을 큰 아들에게 돌린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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