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 "우린 이렇게 가족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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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 "우린 이렇게 가족이 되었습니다"
  • 한상봉
  • 승인 2019.01.2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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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15

예수님을 다시 뵙기 전까지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었는지 다들 알고 계시죠? 우리는 생전에 예수님이 한 말씀 하시면 우왕좌왕 갑론을박하기 일쑤였지요.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던 그날도 그랬습니다. 우리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하시자, 다들 그게 누군가? 설왕설래 하였지요. 이른바 스캔들의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 형님이 내게 고갯짓을 보내 예수님께 한 번 여쭈어 보라더군요. 그렇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답니까? 그분을 밀고했던 유다 형님도 잘못이 있겠지만, 당장의 두려움 때문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난 우리들도 할 말이 없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세 번씩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 형님도 면목이 없고요.

저는 베드로 형님이 오순절 설교를 하는 것을 보고 사실 마음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형님이 이렇게 말재간이 좋으신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기야 그건 말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문제였겠지요. 자기 안에서 용암처럼 터져 나오는 사랑을 간절하게 표현했을 뿐이겠지요. 그날 자신이 인용한 요엘 예언자가 하신 말씀을 본인이 그대로 살았던 것이지요.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 그날에 나의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사도 2,17-18)

우린 처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주 설교를 했는데, 그날도 저는 평소처럼 베드로 형님과 한 짝이 되어 ‘아름다운 문’이란 곳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무엇을 따지려 들거나 대중 앞에 나서는 편이 아니었고,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였던 사람인지라 형님은 저랑 한 패가 되는 걸 좋아했습니다. 자주 실수하던 형님은 동료들의 힐책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늘 움찔했답니다. 그런데 제가 곁에 있을 땐 맘 편히 당신 소신을 밝힐 수 있었다지요.

성문 옆엔 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살아온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우리를 올려다보자, 형님은 그 뜨겁고 커다란 손으로 그니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이때에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베드로와 함께 머물고 더불어 말씀하신다는 것을.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사도들 안에 새록 새삼 부활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실상 형님과 저는 이미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인간적 약점과 허물조차 걸림이 되지 않는 피붙이로 여기고 있었던 거죠. 그건 예수님께서 밑돌을 놓으신 것이었어요. 그분이 돌아가시던 그 순간에 참혹한 십자나무 그늘 밑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남자 중엔 저밖에 없었습니다. 고난을 함께 겪어봐야, 그 고난 가운데서야 우리는 누가 우리의 참된 가족인지 알아보게 됩니다. 동지(同志)나 동료(同僚)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말이 가족(家族)이겠지요. 한 그늘 안에 모여 있는 족속이란 서로 운명조차 나누어야 하니까요.

그때에 유언처럼 예수님께서 제게 새로운 어머니를 엮어주셨습니다. 나자렛 시골에서 자라서 목수의 아내로, 주님의 어머니로 파란만장한 삶을 건너오신 분이셨지요. 그 순간에 다른 여인들 역시 저의 누이요 이모요 어머니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살뜰한 정을 키워왔던, 그래서 그만큼 더 아파했던 베드로 형님을 빼놓을 수는 없을 테지요.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무덤을 발견하고 알려주었을 때 허겁지겁 사실을 확인하러 달려갔던 사람도 저와 형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차츰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가정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그건 혈육에 매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믿음의 가족인 것이지요.      

이렇게 시작한 공동체는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모이고 즐겁고 순박하게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죠.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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