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 후안 디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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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 후안 디에고
  • 마크와 루이즈 즈위크
  • 승인 2016.05.2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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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집 이야기] 과달루페의 성모님을 공경하며

휴스톤의 가톨릭일꾼집인 <카사 후안 디에고>는 1980년 12월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그리고 니카라구아 전쟁 때문에 생기는 많은 피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생겨났다.

우리는 1977년 스페인어를 배우고 가난한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소공동체의 삶을 경험하기 위하여 엘살바도르로 갔다. 오스카 로메로가 대주교가 되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곳에서 했던 진한 경험은 우리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엘살바도르를 떠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과테말라에서 스페인 말을 배웠고 후에 피난민들이 도움을 구하면서 휴스톤에 도착하기 시작했을 때 휴스톤의 한 본당에서 일했다.

루이즈가 휴스톤 공립도서관에서 아이들을 위한 사서 일을 얻었을 때, 우리가 휴스톤 가톨릭일꾼공동체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때가 된 것 같았다. 루이즈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일을 할 수 있었고 마크는 휴스톤의 새 가톨릭일꾼집에 전적으로 매달려 일할 수 있었다. 처음 11년, 즉 우리아이들이 거의 다 자란 후에 루이즈는 일꾼집에서 마크와 함께 전담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크는 워싱톤가에 있는 구 고기시장 건물을 세 내었고 (휴스톤에서 가장 추한 건물이라고 볼 수 있는)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헐벗은 이들을 입히며 환대하기 위하여 손님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도로시와 피터가 시작부터 말했던 것처럼, 마크는 성인들의 방법을 사용하면서 시작했다. 즉 기도하고 사람들에게 일에 대하여 말했으며, 일을 위한 도움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도움은 그렇게 다가왔다. 휴스톤에서, 우리는 과달루페의 성모님이 나타났던 원주민을 기념하여 집 이름을 카사 후안 디에고라고 지었다. 그 때에 그 원주민은 아직 성 후안 디에고가 아니었지만,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의 존엄성과 우리 일의 겸손함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지였다.

휴스톤의 가톨릭일꾼공동체는 스페인 말을 쓰는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목표 전체가 남부를 향해있다. 지난 수년간, 휴스톤 공동체의 많은 가톨릭일꾼들은 남아메리카 출신들이었고 그들 자신이 이주노동자들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스페인 말과 문화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주민들과 피난민들의 고통을 보며 공동체에 참여하였다. 우리들의 2개 국어 신문인 <휴스톤가톨릭일꾼>(지금은 66,000부 정도 인쇄함)은 1981년 5월 5일에 시작하였다.

신문이외에 우리는 가톨릭일꾼운동에 관한 자료(책까지 포함하여)를 스페인어로 발간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사람들은 가톨릭일꾼운동의 사상과 이상에 열광하면서 그들 나라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를 묻는 생생한 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그 첫 번째 낡은 건물은 2년 동안 바쁜 일로 가득찼다.

캐롤 애슈 톤 박사가 그 건물에서 한 개의 싱크대와 변기 하나로 의원을 시작하겠다고 고집 했을 때 첫 번째 의료봉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느 수요일 밤의 전례가 끝난 후 불이 났고 건물은 전소되었다. 다행이 모든 사람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직후에 우리는 서부해안 쪽에서 열린 가톨릭일꾼 종사자들 모임에 참석했고, 건물을 세 내는 대신 구입하라는 충고를 다른 일꾼들에게서 들었다. 그렇게 되면 이웃에 가난 한 이들이 사는 것에 피곤해 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지역에서 내쫓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는데, 후에 우리가 휴스톤 남서지역에 집을 하나 마련하려고 애쓸 때였고, 그 집은 카사 마리아가 되었다.

우리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서 두개의 붙어있는 집을 구입했고, 각각의 집에는 목재 방갈로와 창고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돈이 넉넉하지 않았고 그리고 절대로 지나치게 많은 돈을 가진 적 도 없었다. 불이 났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는 알려지게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 이 도움을 주었지만, 땅과 건물을 구입할 만큼 충분치는 않았다. 사상적으로 고리대금에 관여하지 않는 가톨릭일꾼운동의 입장에 찬성했지만, 우리는 그 집을 사기 위하여 대부를 받았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빚을 갚기를 희망했다. 곧, 휴스톤에 있는 자비수녀회의 로욜라 헤거티 원장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집을 돕고 싶어서 수녀 한 사람을 파견했고, 후에는 빚을 다 갚을 수 있는 액수의 수표를 들고 직접 방문하였으며 우리를 영원히 고리대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다.

3년 후 로즈가의 집들이 또 다른 화재로 탔을 때, 우리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대신 우리는 땅에 2층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콘크리트 벽돌과 강철로 만들었다. 불이 난다면 적어도 매우 천천히 탈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과 기도

지난 20년 동안, 휴스톤 가톨릭일꾼은 라틴아메리카와 세계전역으로부터 피난민과 이주자들을 받아들여 왔다. 이제 휴스톤 가톨릭일꾼 공동체는 16개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일 밤 150명의 사람들이 묵는다. 이 16개의 집은 모두 카사 후안 디에고라는 한 이름 아래 모여 있다. 4만 명이 넘는 이주자들이 카사 후안 디에고에서 살았다. 남자들, 여자들 그리고 청소년들이 일을 찾아 미국에 왔는데 고국에 있 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형편없는 모습으로 화물차를 타고 오거나 몇 날씩 걸어 도착했기 때문에 샤워를 하고 싶어했다. 휴스톤에서 수년 동안 살았던 여성이주노동자들도 일꾼공동체에 머물려고 왔다. 아이들과 임신한 몸을 이끌고 오는 여인들, 매맞은 여인 들, 추방된 사람의 부인과 아이들, 범죄 때문에 감옥에 있는 남자들의 가족들, 교통법위반 등으로 좋은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왔다. 휴스톤에 살고 있는 수백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매주일 식량과 입을 옷을 얻으러 왔다.

잭 데이비스 신부 협동조합이 이주자들을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다치거나 병든 이주자들, 미국으로 들어오는 도중에 머리에 총을 맞거나 다리를 잃어버린 이들, 치료를 받기 위하여 오는 에이즈환자들이 그런 이주자들이었다. 자원의사들이 우리들의 의원을 채웠고 매우 필요한 진료를 한다.

매일 병원, 교회, 경찰서, 학교 그리고 구호처에서 이주자들을 받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개별적으로도 수분마다 질문을 하는 전화나 방문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카사 후안 디에고와 이민 귀화국 사이의 관계를 자주 묻는다. 국경순찰대가 임신한 여인들과 부상당한 사람들이 우리집에 머 물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980년대에 지역이민귀화사무소가 살인에 연루된 밀입국 사건의 목격자들인 수십 명의 사람들을 받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최근에 와서 휴스톤의 지역이민귀화사무소는 카사 후안 디에고에 머물 피난민을 보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따금씩 오는 새로운 손님들에 대해 어떤 제약도 하지 않으며 이민귀화사무소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혼두라스가 허리케인 때문에 파괴되어서 하얀 집은 중앙아메리카 사람들의 추방을 금지하게 되었다. 특히 그 때에는 혼두라스 사람들이 많았다. 이민귀화사무소도 추방할 수 없는 이주자들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였다. 사무소는 한 주간에 500명을 보냈다. 다행히 그들은 매일 100명씩만 카사 후안 디에고로 보냈다.

1994년 INS(이민귀화사무소)는 카사 후안 디에고 앞에서 불법 이주민들을 체포하였는데, 그 중에는 스페인 말을 하는 가톨릭일꾼운동의 종사자들도 있었다. 사무소는 일을 찾는 노동자들을 길거리에서 밀어내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항의가 더 확대되어 조직되었으며, 귀화사무소의 그런 침략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휴스톤의 가톨릭일꾼운동 종사자들은 피터 모린이 제안했던 것처럼 의식의 명료화를 위한 공부와 토론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일꾼운동 시작 때에 피터와 도로시에게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들과 성인들에 대한 공부를 즐기며 하여 왔다. 그들은 니콜라스 베르디예브, 엠마누엘 무니에, 버질 마이클, G. K. 체스터튼, 성 베네딕또, 성 프란시스,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소화 데레사 그 밖에 도 다른 많은 인물들이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큰 기쁨을 느끼는 수많은 순간들을 겪어왔다. 우리 모두는 체험을 통하여 배우고 있지만, 실천하는 사랑은 꿈속의 사랑과 비교해 볼 때 가혹하고 두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카라마죠프 형제들>에서 조시마 신부가 지적한 것처럼, 실천하는 사랑을 위한 매일 매일의 노력은 때때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번은 우리 무료급식 프로그램에 와서 보고 깡통 콩, 밥, 야채 그리고 빵이 적절하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은 식사라고 결정한 한 미국시민이 우리를 변호사에게 보고하였다. 이 비난을 받아들였던 변호사가 우리의 무료급식이 정부나 어떤 단체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단순히 선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정중히 사과했던 적도 있었다.

수요일 저녁, 손님들과 함께 미사를 거행할 때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하나됨을 깨닫는다. 아침마다 함께 성무일도를 할 때에 우리는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일치는 수 년 전 새로운 한 이주자가 휴스톤에 있는 누이동생을 찾아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했을 때 극적으로 또한 실제로 드러났다. 그 이주자가 가지고 있던 정보는 누이동생이 메인 스트리트(우리 집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에 살았다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면서 우리는 그에게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인근 본당의 미사에 가도록 초대하였다.

이건 또 어찌된 일인가! 우리의 손님은 미사에서 그의 누이동생을 찾았다. 너무나 흥분되는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사고 때문에 뇌수술을 받았던 한 청년이 지역 병원에서 우리에게 왔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 나 수주일 동안의 수요일 저녁 미사와 즐거운 기타반주와 함께 부르는 성가 덕분에 그는 어느 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난 내 가 누군지 알아요, 난 내가 누군지 알아요! 나는 이 노래들을 엘살바도르의 신학교에서 불렀어요.”

비폭력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손님들을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하라고 요구한다. 비록 집안에 폭력이 생겨난다고 해도 그렇게 하라고 한다. 실상 폭력은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일은 벌어진다. 우리 집의 첫 번째 손님은 니카라구아 사람으로, 심하게 칼에 찔려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머물 장소가 필요했다. 그 때 마침 엘살바도르에서 피난민들도 도착했다. 이어 우리 일에 대해 들은 사람들로부터 기부 받은 헌 옷들도 도착하기 시작했다. 한 이주자가 있을 곳을 찾지 못했고 루이즈에게 동네 도서관에서 일을 돕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루이즈는 마크에게 연락했고 마크는 작은 가방을 갖고 있었던 그 남자를 데리러 갔다. 다음날, 손님들이 헌옷들을 보고 있었을 때 또 다른 사람이 여자 속옷을 던졌는데 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는 가 방에서 긴 칼을 꺼내서 속옷을 던진 사람에게 공격하고 그의 귀를 잘랐다. 다행히 네 명의 엘살바도르 남자들이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그를 붙잡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항상 문간에서 손님들이 가지고 있는 칼이나 권총을 살펴보고 내놓도록 하고, 떠날 때에 주겠다고 말한다. 한번은 이런 규칙이 진퇴양난에 빠진 적도 있었다. 한 사람이 술에 취해 화가 나서 집을 떠나며 권총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마크는 잠시 동안 생각하더니, 여러 가지 제안을 했으나 손님은 권총을 즉시 돌려달라고 고집하였다. 마크는 권총을 사주겠다고 제안했고 그 남자는 만족했다(그러나 권총은 즉시 버려졌다).

또 한번은 남자 환대의 집에서 우리를 돕고 있던 이주자 그룹의 한 사람이 마크를 불렀다. 그룹과 모든 손님들은 무서웠다. 어떤 사람 이 골프클럽세트를 기증했는데, 한 남자가 그것을 들고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크가 와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집까지 두 블록을 걸어오면서 마크는 내내 기도했고, 일이 잘 해결되면 그 후에도 더 기도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가 집에 들어왔을 때, 모든 남자들은 바깥벽에 꼭 달라붙어서 둥그러니 모여 있었다. 골프채를 든 그 남자는 방의 가운데에 있었다.

주저하지 않고 마크는 그 남자에게 걸어가서 껴안았는데 골프채도 함께 확실하게 끌어안았다. 그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른 남자들이 그에게 잘 대해주지 않았다고 마크에게 말했다. 그 남자는 휴스톤에 있을 곳이 마련되어 마크가 데려다 주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휴스톤 가톨릭일꾼공동체에 참여해 왔다. 휴스톤 가톨릭일꾼은 휴스톤의 가톨릭교회, 가깝고 먼 곳의 친지들, 그리고 피터 모린, 도로시 데이와 성인들의 비전의 도움을 받아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며, 자신들의 삶에 있어 다양한 시기를 바쳤던 수많은 가톨릭일꾼 종사자들이 없었다면 낡은 정육점 건물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16개 집의 공동체로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출처: <참사람되어> 2010. 9. 
원문출처: <The Catholic Worker> 2003. 5. by 마크와 루이즈 즈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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