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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는 사제를 조롱하고 사제는 평신도를 무시하고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38]

현명하다는 것,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누구든 현명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기도 하고 제법 유명한 사상가를 찾아가 듣기도 합니다. 현명해지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사상가의 말을 들어도 현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비해,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많은 책을 읽고 암기하고, 또 다시 읽고, 암기하면 됩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 현명한 이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현명함이란 두 개의 눈으로 과거 이미 행한 일을 돌아‘보며’, 동시에 미래 무엇을 해야 할지 궁리해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를 궁리해 보는 것이 ‘현명함’이란 말입니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서 그 결과로 있는 ‘지금의 나’를 고민하고 ‘지금의 나’에서 시작할 ‘미래의 나’를 궁리하는 것, 그것이 현명함의 길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 조롱하던 ‘과거의 나’를 생각합니다. 그의 부도덕이 싫어 그가 없는 곳에서 큰 고민 없이 조롱하며, 은근히 그를 조롱하는 나의 도덕적 우월감을 자랑했습니다. 그 조롱은 어쩌면 ‘나’는 ‘너’와 다르다는 ‘나의 자기 과시’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의 조롱에서 나의 또 다른 벗은 나의 또 다른 폭력과 부도덕을 보게 되었다 했습니다. 차라리 그의 앞에서 혹은 그의 옆에서 그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조금 불편해서 직접 이야기하고, 더불어 있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과거의 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가 행한 그 잘못을 보게 됩니다. 나는 나와 다른 이들을 자르고 또 자르고 살았습니다. 나의 답이 유일한 답이라며 말입니다. 부조리와 부도덕이 일상이 되어 버린 공간에서 나는 조롱의 언어로 세상과 나누어져 살았습니다. 결국 그와 남이 되어 버린 ‘나’ 홀로 있게 되고 ‘그’도 홀로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 남이 되어 서로 홀로 있게 된 것입니다. ‘나’도 ‘그’도 달리진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그때, ‘우리’로 있기 위해 그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진지하게 대화를 할 걸, 그러면 지금처럼 서로 남이 되어 있진 않을 것인데, 어쩌면 조금 더 먼 미래, 나도 그도 결국은 또 다른 모습으로 서로 벗이라며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두고 후회 합니다. 반성을 합니다. 그때 그가 나의 말을 설령 듣지 않았어도 ‘나’는 ‘그’에게 ‘조롱’이 아닌 ‘대화’를 해야 했었는데. 지금에서야 반성을 합니다. 나의 탓입니다

개신교회의 신학자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빙’의 말이 생각납니다. “‘자비 없는 정의’는 친절하지 않습니다. ‘정의 없는 자비’는 명예롭지 못합니다.” 사랑의 마음 없이, 너의 아픔과 너의 고난과 너의 조건 속에 이루어진 너의 삶에 대한 나의 고민 없이 그냥 나의 머릿속 이것이 유일한 정의라며 너의 모든 삶을 한 순간에 부정하는 것, 그것은 분명 폭력입니다. 사랑으로 그의 삶을 안아주며 비록 부족한 나의 정의이지만 나의 정의가 그의 삶 속에서 무엇으로 드러날지 같이 고민하고 궁리하며 그와 더불어 ‘우리’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물론 힘든 일입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용감한 이는 ‘오른 팔’과 ‘왼 팔’이 있듯이 ‘행복’과 ‘불행’을 모두를 가진다 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더불어 같은 이상향을 향하여 나아가다보면 서로 다른 생각으로 다툽니다. 그러나 더불어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그 사실, 나의 손에 너의 손이, 그리고 ‘홀로’가 아닌 ‘우리’로 걸어가고 있다는 그 사실이 행복입니다. 그 행복을 향하여 걸어가며 다투는 불행의 힘겨움은 더불어 걸어가는 그 행복을 이기지 못합니다.

‘현명하다’는 것은 무엇이 본질인가를 궁리하며 구별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목표가 주어지면, 그 목표를 향하여 어느 것이 좋은 수단인지 궁리해야 합니다. 그 수단은 경우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서로 다른 삶에서 나온 서로 다른 생각들이 서로 다르게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답’만을 유일한 하나의 정답이라며 강요하면, ‘우리’는 부서지고 ‘나’는 더욱 더 작아집니다.

어쩌면 서로 다른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많은 가능성으로 서로 더 깊이 생각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더 큰 ‘우리의 답’을 만들라는 하느님의 선물일지 모릅니다. ‘작은 나의 답’이 아닌 ‘큰 우리의 답’을 만들라는 뜻일지 모릅니다. 이 때 현명함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름이 주는 불행보다 같은 곳을 향하여 ‘더불어’ 나아갈 힘겨운 걸음이 바로 현명입니다. 올바른 수단을 고민하는 것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대화하는 것도, ‘나만의 작은 답’을 벗어나 ‘우리의 큰 답’을 만들어가는 것도 현명입니다.

진리는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나만의 것이 유일한 답이란 생각이 무서운 종양(腫瘍)입니다. 내 몸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내 몸을 죽이는 종양입니다.

조롱이 일상이 된 세상, 교회 역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평신도는 사제를 조롱하고 사제는 평신도를 무시하는 모습에서 과연 교회는 ‘나’와 ‘너’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불행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용감하게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랑 그 자체는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향유하며, 그가 그이기에 그의 아픔도 기쁨도 외롭게 두지 않는 것 입니다. 나에게 어떤 유익이 없는데 말입니다.

어떤 아픔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신도와 사제가 서로 사랑할 때, 서로 잘못에 대해 대화하고 그 대화가 서로의 잘못을 보여줌으로 아프게 하고 울게 하여도 함께 ‘우리의 아픔’으로 녹아들 때, 교회는 진짜 우리로 존재하게 되지 않을까? 힘든 세상, ‘우리’를 ‘우리’로 있게 하는 그 현명함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현명한 신앙과 현명한 개혁과 현명한 이룸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모두의 현명으로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면서 말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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