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복음을 세상에 맞추려는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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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복음을 세상에 맞추려는 유혹
  • 헨리 나웬
  • 승인 2016.05.2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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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이타적인 길-4

영적 삶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삶이다. 거룩한 성령은 우리를 아래로 이끄시는데,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아픔과 멸시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투쟁 가운데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그렇게 아래로 이끄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서 하느님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아래로 내려가는 길, 십자가의 길에 참여자가 됨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밤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은 그들이 더 이상 세계와 세계의 길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했다고 쓴다.

아버지께 드리는 사제적 기도에서 예수님은 말씀한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 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제자들 사명의 기반이 된다. “저는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요한 17,15-19)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에 참여하도록 하는 성령이 바로 우리를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 하는 똑같은 성령이라고 하신다. 그렇지만 세상은 사악한 존재가 배회하는 장소다. 세상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낚아채어 위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돌려놓으려고 하는 유혹자의 집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유혹자와 대면하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이 광야로 내몰려 유혹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다. 아마도 영적 삶의 진정한 자질은 유혹과 대면할 때에만 제대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대면하게 되는 유혹들은 세상에 맞추려는 유혹, 굉장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유혹, 그리고 강력한 힘에 대한 유혹이다. 이 세 가지 유혹들 모두가 위로 올라가는 세상의 길들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이며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명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려는 유혹이다.

세상에 맞추려는 유혹

악마가 예수님에게 말을 붙이며 내놓은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 덩어리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세상에 맞추려는 유혹이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무엇인가를 행하고 그래서 사람들에 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우리 직분의 근거로서 생산성을 선택하라는 유혹이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이런 말을 들어왔는가: “굶주린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는가? 먹을 것, 있을 곳 혹은 입을 옷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실제로 돕고 지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의사들은 치료하고, 변호사들은 변호하고, 은행가들은 재정적으로 도와줄 수 있고, 사회사업가들은 재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가?

이런 말들이 바로 유혹자가 하고 있는 말들이다! 이런 유혹은 우리 정체성의 핵심을 건드린다.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생산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믿게끔 강요된다. 그래서 생산품들, 볼 수 있는 결과들, 만질 수 있는 재화, 그리고 발전에 관한 선입견이 형성된다. 세상에 맞추려는 유혹은 흔들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 유혹은 보통 유혹이 아니라 부르심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산적이고, 성공적이며 그리고 효율적인 사람들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그런 우리들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한다면 제너럴 일렉트릭, 모빌 오일 혹은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정도의 인증받은 직업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세상의 눈에 영향력 있고 존경받기를 추구하는 유혹에 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라는 유혹을 받았을 때, 그분은 유혹자에게 말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예수님은 빵의 중요성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생명을 키우는 힘과 비교하여 빵을 상대화시키신 것이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한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3).

빵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완전한 신뢰를 둘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성취, 효율성, 그리고 생산성은 자신들의 마음을 먼저 주님께 고정시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영향력 있는 행동이 무시되어야 한다 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이 그것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가 바치는 빵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먹으며 진정한 자기됨을 발견하는 그분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본질적인 도전은 하느님과 그 거룩한 말씀이 우리의 인간됨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도록 맡기는 것이고, 매일 이 말씀의 성찬을 취하여 자유롭고 두려움 없는 백성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 세계에서 결과가 아무리 작고 볼 수 없을 때에도 하느님의 현존을 계속하여 증언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기꺼이 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세상의 요구에 맞추려는 욕구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기꺼이 떼어내고 더 깊게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처럼 우리는 적절하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영향력을 가지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향력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매달림으로써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출전: 참사람되어,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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