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집으로 가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순진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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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집으로 가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순진함으로
  • 헨리 나웬
  • 승인 2019.01.21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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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11] 작은 아들의 귀환-3

작은 아들의 귀환은 불확실함으로 가득하다. 그는 올바른 방향으로 여행하고 있으나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외국 땅에서 낙오자로 지내기보다 아버지의 집에서 종으로 지내는 것이 더 나은 대우를 받겠다고 고백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은 아직도 요원한 일이다.

잇속차리기 치사한 참회

그는 자기가 아직 아들임을 알고 있지만,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상실했다고 여기며 “고용된 사람”의 지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회가 있긴 하지만,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빛으로 보면 진정한 참회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 가능성을 제공하는 자기 잇속 차리기의 참회이다.

나는 이런 정신과 마음의 상태를 매우 잘 알고 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자, 난 내 힘으로 살아갈 수가 없고, 하느님이 나에게 남은 유일한 자원임을 인정해야 해. 하느님께 가서 용서를 청하자. 그러면 최소한의 벌을 받고 심한 노동 조건 아래서라도 생존하는 것이 허락되는 희망이 있을 거야.” 이때 하느님은 엄혹하고 심판하는 모습의 하느님이다. 이런 하느님은 나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불안하게 만들며, 이런 모든 자기 잇속 차리기의 사과들을 나에게서 뽑아낸다. 이런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은 진정한 내적 자유를 창조하지 않고 오로지 회한과 원망만 일으킬 뿐이다.

영적 삶의 가장 큰 도전들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인간 안에는 우리를 죄에 계속 매달리게 하고, 하느님이 우리의 과거를 지워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주는 것을 방해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때때로 나의 어둠이 내가 극복하기엔 너무 크다는 것을 하느님께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존엄성을 온전히 회복시키고 싶은데, 나는 고용된 하인으로 만족한다고 계속 고집을 부린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인 나의 온전한 책임감을 정말 회복하고 싶은 것인가? 나는 전적으로 용서받아서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이 가능해지기를 참으로 원하는 것인가? 나 자신과 그러한 본질적인 개선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는가? 나는 나의 뿌리 깊은 하느님께 대한 반항을 부수고 새로운 인간이 부상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사랑에 무조건 승복하고 싶은가?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모습 그대로이기를 그리고 그 분이 모든 치유, 복구, 쇄신을 하시도록 전적으로 원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작업의 일부라도 스스로 하기를 원하는 한, 나는 부분적인 해결로, 예를 들면 고용된 하인이 되는 것 같은 것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고용된 하인으로서 나는 여전히 나의 거리를 유지하고, 여전히 반항하고, 거부하고, 태만하고, 도망가거나 나의 임금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사랑받는 아들로서 나는, 나의 온전한 존엄성을 주장해야 하고 내 자신이 아버지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순진함

방향을 돌리는 것과 집에 도착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현명하게 훈련을 하며 가야 할 필요가 분명하다. 훈련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훈련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새로 아이로 태어나는 길과 똑같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당신들이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못하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18,3). 예수님은 나더러 아이로 남아있으라고 청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되라고 말한다.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두 번째의 순진함을 향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새로 태어난 유아의 순진함이 아니라 의식적인 선택을 통하여 도달하는 순진함이다.

이 두 번째의 어린이됨에, 이 두 번째의 순진함에 도달한 사람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해 진복팔단에서 매우 명료하게 설명한다. ‘사랑받는 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지 얼마 안 되어, 그리고 감히 그분께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세상에 증명하라고 외치는 사탄의 소리를 거부한 직후, 예수님은 공적 사명을 시작한다.

첫 번째 움직임 가운데 하나는 제자들에게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사명에 참여하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제자들을 그분 주위에 모은 뒤에 이렇게 말씀한다: “가난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의로움을 위하여 박해받는 이들은 얼마나 복된가.”

이런 말씀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어떤 모습인지 드러낸다. 그것은 예수님의 자화상이고, 사랑받는 이의 초상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나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진복팔단은 나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집으로 가는 가장 단순한 길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가며 나는 두 번째 아이됨의 기쁨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편안함, 자비, 그리고 하느님을 더 선명하게 만나는 기쁨이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나의 아버지의 포옹을 느끼면서, 단지 천국이 나의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지구도 마찬가지로 나의 유산이 될 것임을 깨닫는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어떤 강박관념이나 충동 없이 자유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가 되는 것, 진복판단을 사는 것

아이가 되어 간다는 것은 진복팔단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찾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이 사실에 대해 알았을까? 나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가 나로 하여금 렘브란트의 이 작품에서 새로운 측면들을 보도록 나를 이끌었는지, 아니면 그의 작품이 나로 하여금 비유의 새로운 측면들을 발견하도록 이끌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아들의 머리를 보면서, 나는 거기에서 두 번째 아이됨의 초상을 볼 수 있다.

나는 친구들에게 렘브란트의 이 그림을 보여주고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질문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들 중에 한 젊은 여성이 일어나서 <돌아온 아들>의 큰 복사판 앞으로 걸어갔고, 작은 아들의 머리를 손으로 짚으면서 말했다, “이 머리는 그의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갓 태어난 애기 머리입니다. 자 보세요, 머리는 아직도 젖어 있고 얼굴은 아직도 태아 같아요.” 거기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여성이 본 것을 갑자기 보았다. 렘브란트가 그리고 있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인 것처럼 어머니이기도 한 하느님의 태속으로 돌아간 것을 또한 그리고 있는 것인가?

그전까지 나는 그림의 청년이 머리를 빡빡 깍은 것을 보고 죄수였던 사람의 머리이거나, 수용소에 살았던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얼굴이 학대받은 인질의 수척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것이 렘브란트가 보여주고 싶었던 모든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 한 그 모임 이후, 나는 작은 애기가 엄마의 태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렘브란트의 그 그림을 더 이상 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 경험은 집으로 가는 나의 여정에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더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작은 아이는 가난하고, 온유하고, 마음이 순수하지 않는가. 작은 아이는 모든 작은 고통에도 울며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작은 아이는 의로움에 굶주리는 목마른 평화 조성가이며, 박해의 마지막 희생자이지 않는가.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육신을 취하고, 마리아의 태속에서 아홉 달을 살았으며, 가까이 있는 목자들과 멀리서 찾아온 현자들로부터 경배를 받은 작은 아이로 이 세상에 온 예수님은 어떤가? 영원한 하느님의 아드님이 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다시 아이가 되어 그분과 함께 아버지의 나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말씀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 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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