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로 2세, 진보신학을 거절한 반개혁적 인민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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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 진보신학을 거절한 반개혁적 인민주의자
  • 한상봉
  • 승인 2019.01.21 10: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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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코-44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갑작스런 선종 이후 교황직에 오른 요한 바오로 2세의 등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했다. 착좌 직후에 멕시코를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는 기꺼이 군중과 함께 노래하고 박수치고 춤추는 인민주의자의 모습을 지녔다.

인권 옹호와 군주제적 교회 모델

요한 바오로 2세 교종

교황은 쉴 새 없이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거리낌 없이 인권 옹호를 부르짖음으로써 교회 내 진보세력에게 투사로 추앙받았지만, 한편에선 사제들과 수녀들이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말고 주교들에게 순명하라고 당부했다. 사제와 수도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회적 행동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권을 옹호했지만 교회 구성원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는 주춤거렸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권옹호와 교회 내 순종이 그의 인격 안에서 무리 없이 통합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처럼 교황의 사회론과 별개로 그의 교회론은 공의회 이전의 ‘절대군주제로서의 교회모델’에 가까웠다. 이러한 태도는 교회 밖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교회 내 민주화를 추진했던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경험과 다른 것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모델은 폴란드 교회였고, 폴란드 교회는 공산정권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신자들에게 교계제도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요구했고, 또 그러한 충성을 받았다. 그는 로마 중심의 가톨릭이야말로 부패하지 않는 진리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순종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울 수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단일정부가 아니라 단일한 신앙으로 통일된 유럽을 원했다. ‘인권’은 그토록 자비로운 심성을 지녔던 교황이 내세우던 중요한 구호 중 하나였지만, 일차적 권리는 언제나 종교의 자유, 더 구체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리였다. 그의 강론과 연설문, 회칙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듯이, 교황은 냉혹하고 퇴폐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자본주의에 몹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물질적 소유에 관심이 없었고, 매우 영성적이며,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다. 또한 지칠 줄 모르고 교회에 봉사하며 때로는 교회에 적대적인 정부도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것은 폴란드와 로마뿐이었기에 숱한 여행 중에서도 다른 민족들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이해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는 지식인이었지만 다른 편협한 지식인들처럼 대중에 대한 경멸감이 없었으며,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숭배와 성인들에 대한 찬양, 종교적 행렬에 대한 열광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인민주의자의 모습이었고, 민중의 집단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가톨릭 상징들을 사제들이 잘 이용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교황에 대한 대중적 열광을 통해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관철시키는 방법도 터득했다.

진보적 신학자를 단속하는 교황청

라틴아메리카 교회와 사회 문제에 대한 전문가였던 페니 러녹스는 <로마 교황청과 국제정치>(한국신학연구소, 1996)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가장 골치 아픈 교회는 브라질 교회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교황의 태도 때문에 가장 먼저 고통을 경험한 교회는 브라질 교회였다.

로마교황청은 브라질교회를 그토록 힘차게 만든 해방신학과 기초공동체를 문제 삼았다. 민중지향적인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아래로부터 탄생하는 자율적이며 수평적인 교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교황은 브라질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하던 개혁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갔다고 판단했다.

 

교황청이 ‘지배계급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인 ‘지역교회의 권한’을 축소하려고 하자 지역교회의 많은 주교와 성직자들이 볼멘 목소리를 냈지만, 정작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브라질의 신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보프였다.

그는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책에서 가톨릭이 직면한 문제는 ‘교회 안의 인권’이라고 밝혔다. 교회는 인권을 선포하는 세계의 ‘양심’이지만, 교회가 자신의 구조 안에서 인권을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보는 교회’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보프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입장을 지지했다.

아마 보프가 민중에 대한 당파성만을 주장했다면 1984년에 교황청의 심문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세상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 의한 교회’에 대해 언급하자, 교황청은 그의 말문을 막았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이후에 나타난 진보적 신학자에 대한 교황청의 제재는 보프 심문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보프를 심문했던 당시의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스힐레벡스와 한스 큉의 입도 틀어막았다.

이브 콩가르를 비롯해 이들 신학자들은 대부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자들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왜 교회 내 인권을 논해야 하는지 잘 묻지 않았다. 선교사들조차 제3세계의 사회적 고통을 치유하느라고 바빠서 교회 내에 도사린 무력한 이들의 고통과 권력화는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과 신학자, 수도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구조를 변혁시키고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것보다 교회권력에 저항하는 게 더 어렵다.

교황 한 사람의 견해가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전일적으로 적용된다고 할 때, 사뭇 상황이 서로 다른 지역교회는 본래 의도와 상관없이 복음을 저버릴 위험이 있다. 이를테면, 요한 바오로 2세처럼 신자들이 자신의 반공주의 노선을 따르기 원할 때, 이는 197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제3세계에서 군사독재를 유지해 오던 나라에선 우익정권에 대한 지지를 뜻하곤 했다.

페니 러녹스에 따르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재임 시 교황청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은 독일교회였다. “미국교회 다음으로 부유한 교회였던 독일 교회는 재정적으로 취약한 바티칸에서 유연한 미국교회와 달리 재정적 근육을 사용할 줄 아는 교회였다.”고 페니 러녹스는 말한다. 특히 쾰른의 요제프 회프너 추기경은 1987년에 선종할 때까지 바티칸의 재정을 관장했다. 그리고 라칭거 추기경은 교황청에서 회프너 추기경의 손발이 되어주었다.

라칭거는 한스 큉에게서 가톨릭신학의 교수자격을 박탈한 것뿐 아니라, 메츠 역시 그의 ‘정치신학’이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고무했다는 이유로 처벌했으며, 여기에 격노한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가 <나는 항의한다>는 글을 썼지만, 라너 역시 라칭거 추기경의 블랙리스트 안에 들어갔다.

교황의 서로 다른 잣대

1981년에 발표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를 역설하고, 작업장에서의 민주주의를 어느 노동조합 지도자보다 잘 표현하고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고 다양한 공헌을 하고 있는 노동운동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건설할 책임을 져야 하는 자신의 당연한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인간의 선의 관점에서 모든 사회문제를 보려고 한다면, 인간의 노동은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다. 아마도 없어서는 안 될 열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평등의 원리를 교회 안에 적용시키는 것은 거부했다. 종교학자인 폴 레이크랜드는 이를 두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커다란 부분들(여성들, ‘참견하기 좋아하는’ 신학자들, 라틴아메리카 교회, 은퇴한 사제들,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 기혼 남성들 및 여성사제를 지망하는 사람들)을 취급하는 교회의 태도를 보면, 그동안 교회가 선포해 온 것의 진실성에 의문을 지니게 된다.”고 비난했다. 이 점에 대해 레오나르도 보프는 “제도교회가 권력유지에 관심이 많지만, 그리스도는 약함과 권력 없음을 당신 메시지의 토대로 삼았다”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권위에 대한 복종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설득력 있는 사랑의 메시지 때문에 그분을 따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1989년 10월 8일 서울 여의도에서 미사를 거행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인기 "교황은 옳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인기가 대단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교황이 1978년 교황에 된 뒤로 바티칸에 숨어 있지 않고, 104차례에 걸쳐 해외순방 길에 올라 129개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다. 젊어서 아마추어 배우 생활도 했으며, 생전에 극장을 사랑하던 요한 바오로 2세는 장엄한 행사를 선호했다. 몇 차례에 걸쳐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장엄예식의 준비를 영화감독인 프랑코 제피렐리에게 맡길 정도였다.

1985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 방문했을 때는 꽃으로 뒤덮힌 높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열린 옥외미사가 제일 중요한 행사였다. 이런 미사에서는 늘 수많은 행상들이 교황의 모습이 그려진 티셔츠나 수건, 초상화들을 팔았으며, 기업주들은 교황을 광고로 이용했다. 이를 두고 많은 진보적 신학자들은 교황이 장엄한 행사를 통해 교황권을 강화하려고 방문했다고 볼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군중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교황은 옳다.”는 확신을 다져갔다.

교종 프란치스코, 따뜻하고 개혁적 교황

다수의 언론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를 동반 시성한 것을 가톨릭교회 안의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에 대한 균형감 있는 배려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교회 안의 다양한 입장을 가진 세력들을 다독거리면서, 교황이 바라는 교회 개혁과 ‘새로운 복음화’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교회를 개혁하려는 세심한 발걸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교회의 베르골료 추기경,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처럼 물욕이 없으며 재치 있고 발랄하며 소박하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해방을 후원한다. 한편 요한 23세 교황처럼 로마 중심주의에서 자유로우며, 성직자들의 출세주의와 관료주의를 혐오한다. 그리고 겸손하고 개혁적이다.

‘땅 끝에서’ 로마로 온 교황, 프란치스코는 지역교회를 충분히 신뢰한다. 그래서 교황청 개혁 자문단을 꾸리면서 교황청 관료들이 아닌 지역교회에서 두루 인재를 호출했다. 그가 요한 바오로 2세와 요한 23세 교황을 성인품에 올리면서 “따뜻한 사목자의 시선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교회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현실로 조금씩 옮기고 있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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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오성 2019-04-12 22:13:52
한상봉씨 글을 보면, 언제나 사실을 근거한 듯 객관적인 듯 시작하다가... 결국 자신의 진보성향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주관적인 눈으로 사실을 근본적으로는 왜곡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역사라는 것이 물론 모두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좀 더 참되고 성숙한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을 통해서 배우고 제대로 된 깊이있는 신학공부를 통해서 신학적인 전후맥락과 인과관계들을 좀 더 깊이있게 통찰하면서 교회 안에서의 일들을 서술하는 역량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