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그래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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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그래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인가?
  • 헨리 나웬
  • 승인 2019.01.14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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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10] 작은 아들의 귀환-2

돈과 친구들, 명성, 자기존중, 내적 즐거움과 평화 등... 그가 무엇을 잃어버렸든 상관없이, 그는 여전히 그의 아버지의 아이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이런 말들을 마음에 품고서, 그는 돌아설 수 있었고, 외국을 떠나 집으로 향했다.

아들됨의 바닥을 치고

작은 아들의 귀환의 의미는 다음 말에 간결하게 표현되고 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한편으로 작은 아들은 자기가 아들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했다고 깨달으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그 존엄성에 대한 상실감이 또한 그로 하여금 잃어버릴 존엄성을 갖고 있는 아들이 참으로 자신임을 깨닫도록 해 준다.

작은 아들의 귀환은 비록 그가 존엄성에 속한 모든 것을 잃었어도, 다시 아들됨을 주장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다. 실상,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는 자기 정체성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그는 아들됨의 바닥을 친 것이다. 뒤돌아보면, 그 탕자는 자기 존재의 기반과 만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것 같다.

자신이 돼지로라도 취급 받기 원하고 있음을 보았을 때, 그는 그가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고,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이 죽기보다 살아야겠다는 그의 선택에 기초가 되어주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진실과 마주치게 된 후, 그는 아주 약하게나마 그를 ‘사랑받는 아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비록 멀리서나마 축복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깨달음과 비록 안개처럼 희미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 아들로 하여금 아무런 공과를 주장할 수 없어도 자기가 아들임을 다시 주장하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변덕스러운 마음의 가장 깊은 요구

수년 전, 나 자신도 매우 구체적으로 이런 선택과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즉, 돌아갈 것인가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믿음직하고 생명을 주는 것처럼 보이던 우정이 점차 나를 집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지도록 밀어내었고 마침내 나는 완전히 그 우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영적 의미로 보자면, 우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것들을 다 써버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었다. 나는 일에 대한 관심도 잃었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도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나의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자기 파괴적인지 깨닫는 만큼, 나는 사랑에 굶주린 마음 때문에 자기 존중감을 얻기 위한 기만적인 방식에 계속 빠져들었다.

마침내 우정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파괴시키든가 아니면 내가 갈구하고 있었던 사랑이 사실은 집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거나 둘 중에 선택을 해야 했다. 이때 연약한 한 소리가 속삭였다. 어떤 인간존재도 내가 갈구했던 사랑을 줄 수 없을 것이고, 어떤 우정도, 그 어떤 친밀한 관계도, 어떤 공동체도 나의 변덕스러운 마음의 가장 깊은 요구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 부드럽지만 집요한 소리는 나의 소명에 관하여, 나의 초기 결단에 관하여, 나의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많은 선물들에 관하여 말했다. 그 소리는 나를 “아들”이라고 불렀다.

버림받았다는 번민은 너무나 쓰라려서 그 소리를 믿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절망을 보고 있는 친구들은 나에게 번뇌를 넘어서고 집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라고 계속 부추겼다. 마침내 나는 더 많이 이런 고민을 발산시키는 대신 고립을 선택했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자리로 갔다. 고독 속에서, 나는 천천히 그리고 주저하면서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듣게 되었다.

이 고통스럽지만 희망에 찬 경험이 나를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영적 투쟁의 한가운데로 데려갔다.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에게 생명이나 죽음을, 축복 아니면 저주를 내놓는다. 생명을 선택하라, 그럼으로써 네가 너의 하느님 야훼의 사랑 안에서 살고 그분의 소리에 순종하며, 그분께 꼭 매달려 있기 위해서이다”(신명 30,19-20). 참으로 그것은 생명인가 죽음인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를 가두는 세상의 거부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를 주장할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유다와 베드로 사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 베드로는 그분을 부인했다. 두 사람 다 잃어버린 자녀들이다. 유다는 그가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라는 진리를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 없어서 목을 맸다. 베드로는 절망한 가운데에서도 이 진리를 주장했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유다는 죽음을 선택했다. 베드로는 생명을 선택했다.

나는 이 선택이 항상 내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늘상 나 자신의 상실감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나의 본래의 선함, 하느님이 주신 나의 인간성, 내가 본래 축복 가운데 있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죽음의 세력이 나를 돌보도록 허락한다.

이런 일은 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때마다 계속 다시 일어난다: “난 좋지 않아. 나는 쓸모가 없어. 나는 가치가 없어. 나는 사랑 받을 만하지 않아.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하고 말한다. 또는 자신과 타인들에게 나의 삶이 살만한 가치가 없으며, 짐만 되고, 문제만 되고, 갈등의 원인이나 다른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를 착취하기만 할 뿐이라고 확신시키는 사건들과 상황을 나는 항상 수없이 뽑아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한 이 어두운 내적 느낌을 갖고 살아간다. 탕자와 대조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어둠이 그들을 완전히 삼키도록 허용하여 그들이 방향을 바꾸어 돌아가는데 필요한 빛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그들 자신을 죽이지 않을지는 모르나, 영적으로 그들은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본래의 선함을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므로 따라서 그들에게 인간성을 부여한 아버지에 대한 믿음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했을 때, 그분은 “그것이 매우 좋다.”(창세 1,31)는 것을 보셨고, 어두운 소리들 에도 불구하고 어떤 남자나 여자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다.

그렇지만, 나 자신의 아들됨에 관한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어두운 소리들은 내가 좋지 않으며 따라서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작업”을 통하여 나의 선함을 성취할 때에만 비로소 내가 선해지고 좋아질 수 있다고 설득시키려 한다. 이 암흑의 소리들은 나를 “나의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라고 부르며 어떤 찬사나 성취랑 상관없이 나의 존재가 사랑받는 존재라고 각성시키는 소리를 재빨리 잊도록 이끈다. 이 어두운 소리들은 나를 계속 “나의 호의가 머무는 이”라고 부르는 그 따스하고, 부드러우며 빛을 주는 소리를 떠내려 보낸다. 어두운 소리들은 나를 실존의 변방으로 끌어내어 내 존재의 중심에서 사랑이 가득한 하느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도록 만든다.

아버지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국을 떠나오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길고도 험하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탕자가 무엇을 했는지는 매우 분명하다. 작은 아들은 이야기를 준비한다. 그는 돌아오면서, 아들이라는 지위를 기억할 때에,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이곳을 떠나 나의 아버지에게 가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저는 더 이상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당신 하인들 중의 하나로 대우하십시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내적 삶이 얼마나 이런 말들로 가득한지 통렬하게 깨닫는다. 실상, 나는 머릿속으로 어떤 만남을 상상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표현할 때에, 자랑하거나 사과하거나, 선언하거나 방어하거나, 칭찬이나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등등의 움직임이 없는 때가 거의 없다. 마치 나는 영원히 부재하는 동반자들과 긴 대화를 하고, 그들의 질문을 예측하고 나의 대답을 준비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 같다. 나는 이러한 내적 반추와 중얼거림에 얼마나 많은 나의 정서적 에너지가 들어가는지 놀라곤 한다. 그렇다, 나는 외국을 떠나고 있다. 그렇다, 나는 집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왜 이런 말하기의 준비는 결코 끝나지 않고, 나는 해방되지 못하는가?

이유는 분명하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진정한 신원을 주장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돌아가고 있는 하느님이 설명을 요구할 것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그분의 사랑이 조건부라고, 집이 내가 온전히 확신할 수 없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집으로 걸어가면서도, 나는 그곳에 도착했을 때 참으로 환영받을지 의심을 계속 품고 있다. 나의 영적 여정을 바라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고도 피곤한 여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여정이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본다.

나는 나의 실패를 깨닫고 아들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실패가 큰 곳에, “은총은 항상 그것보다 더 크다”(로마 5,20)는 사실을 아직도 온전하게 믿을 수 없다. 아직도 나의 무가치함에 매달리면서, 나는 아들에게 속한 자리보다 훨씬 아래 자리에 나 자신을 배치한다. 전적으로 믿는 것, 절대적인 용서는 즉각 오지 않는다. 나의 인간적 경험은 타인이 복수를 기꺼이 포기하고 나에게 어떤 애덕을 보여주는 선까지 내려가야 용서가 가능하다고 말해준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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