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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미움 받아도 좋아, 난 진실을 말할 테야"<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그리고 강하다>, 슈테판 볼만, 이봄, 2014

“저는 두렵습니다. 이것은 여성혐오로 인한 살인사건입니다. 벌써부터 인터넷 커뮤니티나 몇몇 기사에는 이 사건에 여성혐오라는 프레임을 씌우지 말라는 글이 많이 보입니다. 불편하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해서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묻지마 살인은 아무 이유 없는 살인입니다. 하지만 살인자에게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자라서.’ 이것이 진실입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2016년 5월 17일. 밤을 꼴딱 새며 대자보를 써서 강남역으로 달려가 고인을 추모한 딸아이의 글이다. 대자보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불안함, 여성혐오와 폭력을 멈추고 대신 공론화하고 법제화 하자는 호소가 빼곡이 적혀 있었다.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그리고 강하다>, 슈테판 볼만, 이봄, 2014

딸은 이 사건 이후 페미니즘 동아리를 만들어 공부하기 시작했고, 대학원도 문화인류학을 선택했다. 여성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성적 지향을 가지고, 어떤 꿈이 있었는지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그저 여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폭력을 거부하고, 여성들 자신에 대한 검열과 기만과 불안을 멈추고, 이젠 행동하자고 제안했다. 딸은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의 첫걸음을 떼었다.

슈테판 볼만의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그리고 강하다>는 페미니스트인 딸의 추천도서인 셈이다. 책을 받는 순간 우선 책 제목이 내 눈길을 끌었다. 생각하는 여자가 왜 위험할까? 누구에게 위험한 걸까? 남편이 그 책은 읽지 말라고 하는 걸 보니 남자에게 위험한 모양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학자, 철학자, 저널리스트, 정치인 22명의 여성들은 누가 봐도 똑똑하고 강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위인들의 삶이 그렇듯, 그녀들 삶 역시 완벽하지 않다. 스스로의 약점과 무력함에 부딪혀 수없이 좌절과 패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시련 앞에서 무너지기보다 다른 방법의 도전을 택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삶’이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기

책을 읽으면서 22명의 여성 모두가 대단하고 멋지다고 느꼈지만, 특히 한나 아렌트의 삶과 생각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어떤 사안을 놓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했고, 생각했고, 행동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내가 가지지 못한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짧은 지면에 소개되어 있기에 그녀의 삶과 생각을 촘촘히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녀를 더 알고 싶어 몇 년 전에 보았던 <한나 아렌트>라는 영화를 찾아서 다시 한 번 보았다. 책을 읽고 영화를 다시 보니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녀의 말과 행동이 명료하게 다가왔다.

영화는 1960년 5월, 전쟁이 끝나고 전범으로 수배된 아이히만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가스실에 가두고 집단 학살하라는 ‘최종해결’을 수행한 독일 나치의 친위대 장교이다. 미국 시사 주간지 <뉴요커>는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한 원고를 한나 아렌트에게 부탁한다.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 철학자이자 사상가이다, 1933년, 나치에게 체포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미국으로 망명해 온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인가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간 그녀는 재판을 지켜보면서 혼란에 빠진다.

 

아이히만의 전범재판

당시 유대인들은 아이히만을 인간의 탈을 쓴 ‘악마’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너무도 담담한 표정으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악의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 때부터 아렌트는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마침내 타자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원고가 <뉴요커>에 실리고 난후 세상은 떠들썩해진다. 그녀는 원고에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 그 자체였다.” 라고 썼고, “유대인 지도부 중 다수가 어떤 식으로든 나치와 협력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 많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아이히만을 응징할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당연한 반응이었다. 독일에서 망명해온 사랑하는 친구들 역시 배신감으로 그녀를 이해하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렌트가 빗발치는 항의전화와 협박까지 받으며 지켜내려 하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히만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악마’가 아니고 ‘평범한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이 600만 명을 가스실로 데려가 참혹히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사유의 부재’ 즉, 이것이 옳은 일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대부분의 악행은 선해지거나 악해지기로 결심한 적이 결코 없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이것은 슬픈 현실이다.” 여기에서 ‘악의 평범성’이 생겨난다고 했다.

우리 역시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악행을 저지르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판단의 무능력’이 부른 ’악의 평범성‘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 혹은 내 안에서 얼마나 많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가.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백남기 사건, 태안 화력 발전소 김용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불의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해맑은 얼굴로 말하는 수많은 아이히만이 우리 주변에도 있다.

아렌트의 말대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아니 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 계속 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인간에 대한 예의나 연민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다. 자기만 행복하고 기쁘면 그만인, 그저 자기들만의 천국을 희망할 뿐이다. 그래도 그들은 아이히만처럼 말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가스실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고. 시켜서 한 일이라고. 내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한나 아렌트 영화와 책에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단 한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아이히만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악의는 없었다’고 말한 장면과, 성경에서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오버랩이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 지도부가 나치에게 어떤 식으로든 협력했다는 아렌트의 주장이, 예수님을 처형하라고 빌라도에게 넘겨 준 유대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생각나게 했다. 악이 행해지는 방식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서일까. 아니면 세상에는 생각 없는 아이히만들이 많아서일까.

아렌트는 우리 모두에게 판단력을 요구한다.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을 당대의 엄청난 범죄자로 만든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순전한 ‘생각 없음(thoughtlessness)’이다.” 소름끼치는 통찰이다. 하지만 아렌트의 이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사유의 전당’이라고 불리던 대학에서조차, 철학과 인문학은 취직이 잘 안 되는 과목이라는 이유로 폐강되고 있는 한심한 현실이다. 그리고 SNS의 발달로,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보다, 정보의 홍수에 빠져 즉각적인 반응만 기대하고 있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거기서 내린 결론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행동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한나 아렌트

미움받을 용기

한나 아렌트는 지그프리트라는 과격파 유대인 운동가에게 ‘너는 유대인의 수치야!’라는 말까지 들으며 원고를 책으로 내지 마라는 협박을 당한다. 그리고 친구인 쿠르트는 병문안하러 온 아렌트에게 “넌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니?”라고 묻는다, 아렌트는 “나는 어떤 민족도 사랑하지 않아요. 유대인이라고 특별한가요. 나는 오직 내 친구들만 사랑해요.”라고 대답한다. 그녀의 이런 당당한 태도는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은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진 자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닐까.

아렌트는 사건의 표면만 보지 않고 본질을 보려한다. 사실을 왜곡시키거나 단체나 민족의 이름으로 숨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하는 친구들이 그녀에게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껴도,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냉철한 눈으로 진실만을 보려한다. 우리는 남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욕먹을까봐, 따돌림 당할까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미움 받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회색분자처럼 행동한다. 그러면 진실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럼 나에게는 당당함이 없는가? 나에게 있어 당당함은 세월호 사건에서 출발한다. 그전에는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나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내안에 다른 이들을 향한 연민이 있음을 체감했다. 안산 분향소에서 304명의 꽃 같은 아이들 영정사진을 보며, 숨이 막히고 가슴이 뻐근해옴을 느꼈고, 팽목항으로 광화문으로 다니며,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기억하겠다고,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려고 또다시 거리로 나갔다. 광화문 광장에서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많이도 맞았지만, 내 안의 뜨거운 기운으로 춥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나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는 도저히 느끼기 힘든 당당함과 용기였다.

나를 당당하게 만드는 또 하나는 '가톨릭 일꾼'이다. 가톨릭 일꾼은 창립자인 도로시데이의 ‘환대’하는 삶과 정신을 본받아 기도하고, 공부하며, 행동한다.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누리고, 책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만의 언어를 갖게 되었다.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생기고, 내 생각이 촘촘해지고 세심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만남과 나눔을 통해, 나에게만 고정되었던 시선이 당당히 세상을 향하게 되었다. 일꾼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우리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 함께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힘들고 아픈 이들 곁을 묵묵히 지켜 주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도 한다. 요즘 가톨릭 일꾼에서 하고 있는 글쓰기 수업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관계 맺으면서, 나의 인생관을 되돌아보는 힘겹지만 소중한 시간임을 고백한다.

사유의 의무

영화 <한나 아렌트>,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 2012

한나 아렌트가 보여준 당당함의 절정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녀를 대학에서 쫓아내려던 대학 당국자들과 청강생들 앞에서, 골초인 그녀가 담배를 피며 시작하는 7분간의 강연을 소개하고 싶었다. 내 눈과 귀를 열고 온전히 집중했던,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었던 명쾌한 부분이다. 

“박해받은 건 유대인인데 아이히만의 행위를 왜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세요?” 라는 학생의 질문에 “유대인도 인간이기 때문이죠. 바로 그걸 나치는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범죄는 그래서 ‘인류에 대한 범죄’입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유대인입니다. 나치를 옹호하고 동포를 능멸한다고, 자신을 증오한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비난에는 합리적 근거가 없습니다. 그저 비열한 인신공격 일뿐이죠. 아이히만을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의 평범함과 그의 악행을 조화시키려 했습니다. 이해하려고 하는 건 용서하는 것과 다릅니다. 난 이해하는 걸 의무라고 봤어요. 그건 이것에 대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 사유의 바람이 드러내는 건 지식이 아닙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아름다운 것과 못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유가 사람들에게 파국을 피할 수 있는 힘을 주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배가 가라앉는 흔치 않은 순간에. 고맙습니다.”

‘이렇게 배가 가라않는 흔치 않는 순간에’라는 마지막 말이 특히 마음에 와 꽂힌다. 세월호 사건 당시, 구조할 의무가 있는 이들에게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면, 적어도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 역시 304명의 꽃 같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생각 없는’ 아이히만들이었다.

이해하는 걸 ‘의무’라고 봤다는 말, 그것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의 의무’라고 한 말. 그녀가 세상에 온 이유를, 살아가는 이유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그리고 강하다>라는 책으로, <한나 아렌트>라는 영화로 만난 그녀는, 고집 있는 사상가였지만 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휴머니스트였다. 그래도 한나 아렌트가 나에게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지점은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진 ‘당당한 여성’이라는 점이다.

아직도 창백한 초승달이 걸려 있는 컴컴한 새벽, 어둠과 두려움을 뒤로하고 ‘다만 여자라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여학생의 죽음을 추모하러 묵묵히 가고 있는 딸의 뒷모습이, 외롭지만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진 당당한 사상가, 아렌트를 닮았다고 하면 과장일까.
 

이정화 크리스티나
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가톨릭일꾼 소모임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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