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3세-에라스무스 "교리 때문에 심판받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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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에라스무스 "교리 때문에 심판받는 게 아니다"
  • 한상봉
  • 승인 2019.01.1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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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코-43

공의회 이전까지 교황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가 선언한 ‘교황의 무류권’을 지닌 절대군주처럼 행동했다. 교황이 주교 선출과 임명권을 독점하고, 모든 권한은 바티칸에 집중되었다. 또한 가톨릭교회야말로 ‘완전한 사회’라는 믿음으로 모든 세속제도와 종교제도의 수호자임을 강조하고, 진부한 교리문답을 되풀이하면서 성인숭배와 유물에 대한 의식주의(儀式主義)와 헌신을 강조했다.

결국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권력의 지배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교회를 떠나갔다. 종교개혁 당시 에라스무스는 성직자들이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권위적인 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며, 교황직에서 정치성을 배제함으로써 교황직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기를 앞질러 요청했다. 당시 교회는 공감보다 훈계를 좋아했던 심판자로서의 교회였다. 신학상의 사소한 문제를 꼬치꼬치 따지는 것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를 원했던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유래되는 성령이 한 몸이신 성부나 성자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성부와 성자 두 분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벌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친절, 선량, 인내, 성실, 겸손, 절제, 순결 등을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벌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한 23세 교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면서 공의회가 신학적인 토론장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개막연설에서 “주교들은 이제 더 이상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예언자가 되지 말고 이 세상에 자비의 치료약을 제공하자.”고 말함으로써, 프란치스코 교종이 <복음의 기쁨>에서 교회는 상처 많은 세상에서 아픈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교회가 ‘철저히 세속적이면서도’ 짐짓 세상 문제에 무심한 듯이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는 ‘거룩한 고립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요한 23세의 생각이었다.

 

요한23세 교종의 공의회 서명

한편 요한 23세는 15세기의 콘스탄츠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에서 천명했던 것처럼, 초대 교회로 돌아가 교회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과 권한을 공유하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지역 주교들은 더 많은 자율성을 갖게 되었고, 평신도들은 교회의 일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라틴어는 토착어로 대체되었고, 종교적 자유와 문화적 다양성이 존중되었다. 또한 가톨릭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질 것이 강조되었으며, 다른 종교 및 세상과 대화할 임무가 주어졌다.

이후 교회는 ‘세속권력으로부터 받은 특권들’을 원치 않으며, 교회의 정당한 권리들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교회의 복음적 신실성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면 거부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후 교황들은 교황의 대관식을 거부하고 ‘즉위미사’로 대체했으며, ‘짐’ ‘전하’ ‘각하’ 등 제국교회에서나 사용할만한 권위적인 용어들을 폐기해 나갔다.

물론 교황직은 ‘친교와 일치의 반석’으로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 것으로 재확인되었지만, 몸체로서 주교들의 중요성이 재천명됨으로써 힘의 균형을 회복했다. 이는 로마 바티칸 중심의 중앙집권적 태도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고, 지역교회의 주교회의가 강조되고, 주교들의 정기적인 자문회의인 시노드(Synod,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를 신설했다. 공의회는 시노드가 입법 기능을 갖는 상임의회로 발전하기를 바랐다.

유럽 교회 중심이었던 공의회에서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교회 등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공의회의 영향을 가장 직접 받았다. 미국 주교회의에서 평신도와의 협의는 관례화되었고, 금육과 연옥을 강조하던 이전 교회와 대조적으로 미국 교회는 무엇보다도 자비와 정의, 공동체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공의회의 영향이 극적으로 표출된 곳은 라틴아메리카였다. 브라질, 칠레, 페루를 중심으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1968년 메데인 주교회의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온 힘을 쏟기로 결정했다. 주교들은 ‘제도화된 폭력’을 사회악이라고 비판하며, 종속이론에 기초해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은 11년 뒤에 멕시코의 푸에블라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재확인되었다. 교회가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제와 수녀와 교리교사들이 군사정부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새로운 순교에 이어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강조하는 해방신학의 등장, 성경을 의식화 도구로 사용한 교육 방법 개발, 그리스도인으로서 증거행위를 통해 사회변혁을 꾀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기초공동체’가 건설되었다. 한국 교회에서도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그 시기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출범해 유신독재에 맞서 싸웠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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