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도하고 영성 돌아온 탕자
[돌아온 탕자] 고립무원 작은 아들 "사랑은 없다"[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9] 작은 아들의 귀환-1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13-20)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잃어버리다

아버지가 붙잡고 축복을 한 젊은 청년은 가난한, 매우 가난한 남자이다. 그는 대단한 자부심과 돈을 갖고 집을 떠났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식솔로부터 멀리 떠나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볼 결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는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돈, 건강, 명예, 자기존중, 명성... 모든 것이 헛되이 낭비되었다.

렘브란트는 이 젊은 청년의 조건에 대해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의 머리는 머리칼이 없다. 렘브란트가 자신을 창녀촌에서 거만하고 도전적인 탕자 아들로 그렸을 때의 그 긴 곱슬머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젊은 청년의 머리는 이름이 숫자로 바뀐 죄수의 머리이다. 감옥이나 군대에서, 신입생 환영예식이나 수용소에서 한 남자가 머리칼을 깎이면, 그는 개별성을 나타내는 표징들을 다 빼앗긴다. 렘브란트가 청년에게 입힌 옷은 속옷으로, 그의 야윈 몸을 겨우 가리고 있다.

아버지와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키 큰 남자가 입고 있는 옷들은 품이 넓은 붉은 망토로서, 그들의 지위와 위엄을 보여준다. 무릎을 꿇고 있는 아들은 외투가 없다. 황갈색이고 다 떨어진 속옷이 다만 그의 지치고 뼈만 앙상한 몸을 가려줄 뿐이며 모든 기력은 다 소진되었다. 그의 발바닥은 길고도 굴욕적인 여정을 이야기해 준다. 왼쪽 발은 다 떨어진 샌들로부터 미끄러져 나와 있고 흉터가 있다. 오른 발은 겨우 부러진 샌들을 걸치고 있는데, 이 또한 고통과 비참을 말해준다.

모든 것을, 다만 한 가지, 칼만 빼놓고, 빼앗긴 사람이 바로 그 남자이다. 그 사람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유일하게 남은 징표는 엉덩이에 걸려있는 단검 – 그의 고귀한 신분의 상징인 – 뿐이다. 타락 한가운데에서도, 그는 자신이 아직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진실에 매달리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은 그의 귀중한 칼, 그의 아들됨의 상징인 칼을 팔았을 것이다. 칼은 그곳에서 비록 아들이 자신은 걸인이요 낙오자라고 말하면서 돌아왔지만, 아직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기억하고 소중하게 여긴 아들로서의 자각이 마침내 그로 하여금 돌아서도록 설득한 것이다.

나는 내 앞에 외국 땅 깊숙이 들어가 가져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사람을 보고 있다. 나는 허무, 모욕, 패배를 본다. 아버지와 너무나 많이 닮았던 그가 이제는 아버지의 하인들보다 더 형편없이 보인다. 아들은 종처럼 변했다.

먼 나라에서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들이 집을 떠났을 때 생겨난 모든 물질적 신체적 결과이외에도, 무슨 내적인 결과들이 벌어졌는가? 사건의 결론은 꽤 예측할만하다. 하느님이 머물고 있는 자리인 아버지로부터 도망치면서, 더 이상 나는 나를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불러주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그 소리를 덜 들을 때마다 나는 세계의 조작과 권력놀이에 더 단단하게 걸려든다.

이런 방식으로 전개된다: 나는 내게 안전한 집이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확신할 수 없게 되고, 나보다 더 낫게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 나는 그들이 있는 곳에 어떻게 갈 수 있는지 골몰 하게 된다. 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성공을 성취하고 인정받기 위하여 애를 쓴다. 실패할 때에 나는 다른 사람들을 질투하거나 원한을 품는다. 성공할 때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질투하거나 원망할까봐 걱정한다. 나는 내가 너무나 갈망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봐 혹은 이미 가진 것을 잃게 될까봐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의심하거나 방어적이 된다.

이러한 필요와 욕구의 혼란에 빠져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의 동기를 알지 못한다. 나는 나의 주위에 의하여 희생된다고 느끼며, 다른 사람들이 행하거나 말하는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 항상 나 자신의 감시자가 되어, 나는 내적 자유를 잃고 세계를 내편에 서는 사람들과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로 분리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도 나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의심한다. 나는 나의 불신에 대한 증거물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디를 가나, 나는 증거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그리고서 나는 정말 누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의심한다. 나의 몸은 슬픔으로 가득 찬다. 나의 삶은 의미를 잃는다. 나는 잃어버린 영혼이 되어간다.

작은 아들은 주위의 아무도 그에게 작은 관심 하나라도 보여주지 않았을 때 얼마나 상실감을 느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그들의 목표를 위하여 사용될 수 있을 때에만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쓸 돈이 하나도 없고 줄 선물이 없을 때, 주위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멈추었다. 완전한 이방인이 된다는 것, 아무도 어떤 인정의 징표를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상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실제로 외로움을 느끼는 때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공통으로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이다. 돼지에게 주는 음식조차 아무도 그에게 주길 원하지 않았을 때, 작은 아들은 자신이 다른 이에게 동료인간으로조차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다만 내가 어느 정도의 수용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를 부분적으로 깨달을 뿐이다. 공통의 배경, 역사, 비전, 종교, 그리고 교육; 공통의 관계, 생활방식, 그리고 관습; 공통의 나이와 직업; 이 모든 것들이 수용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항상 우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어떤 것을 찾는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보통의 반응으로 보인다.

내가 “나는 네덜란드 출신입니다.”라고 말할 때 응답은 자주 이렇다: “아, 나도 그곳에 가봤습니다.” 혹은 “난 그곳에 친구가 있어요.” 혹은 “아, 풍차, 튤립, 그리고 나막신!”반응이 어떻든지, 항상 공통의 끈을 찾는 상호적인 노력이 있다. 공통적인 것이 적을수록 함께 하는 것이 더 어렵고, 우리는 더 서먹서먹하게 느낀다. 내가 말을 모르거나 다른 이들의 관습을 모를 때, 그들의 생활방식이나 종교, 그들의 예식이나 예술을 이해하지 못 할 때, 그들의 음식과 식습관을 모를 때... 그때에 나는 더 낯설게 느껴지고 상실되는 느낌이다.

작은 아들이 주위로부터 동료인간으로 더 이상 취급되지 못했을 때, 그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근원적인 고립감, 심오한 외로움을 느낀다. 그는 참으로 상실되었고, 바로 이 완전한 잃음이 그를 정신 들게 해주었다. 그는 자기의 고립무원을 깨달음으로써 충격을 받았고, 갑자기 그가 죽음에 이르는 길로 가고 있다고 깨우쳤다. 그는 가족, 친구들, 공동체, 아는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음식 등 생명을 주는 것들과 너무나 분리되어 있어서 다음 단계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될 것이라고 알게 되었다.

별안간 그는 그가 택한 길을 뚜렷이 보았고, 그 길이 어디로 그를 데려갈 것인지도 보았다. 그는 자신이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가고 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내딛으면 파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치명적인 순간에, 그로 하여금 생명을 선택하도록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가장 깊은 자아를 다시 발견한 덕분이었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가톨릭일꾼> 종이신문을 구독 신청하려면 아래 배너를 클릭하세요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가톨릭일꾼 기사는 상업적 용도 아니라면 출처를 밝히고 누구나 퍼갈 수 있음>

헨리 나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