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해방신학을 복권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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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해방신학을 복권시키다
  • 한상봉
  • 승인 2018.12.3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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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코-41
by Jose Ignacio Fletes Cruz

오랫동안 ‘로마중심주의’를 관장해 왔으며, 전통신학의 수호자처럼 군림했던 신앙교리성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신앙교리성(Congregatio pro Doctrina Fidei)은 교황청 기구의 하나로 신앙의 순수성과 정통성의 유지 발전을 사명으로 삼고 있으며, 16세기에 ‘이단’을 감찰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립된 검사성이 그 기원이다. 이른바 교황청의 ‘종교재판소’였던 셈이다. 신앙교리성은 특히 198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 해방신학과 여성신학 등을 경계해 왔으며, 특히 세계의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신앙을 검열해 온 위태로운 기관이었다. 교황을 배출할 정도로 그 감찰기능 만큼이나 위세가 등등했던 신앙교리성에 새 바람이 불어온 것은 2012년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그해 7월 2일 루드비크 뮐러(Gerhard Ludwig Müller) 대주교를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할 때 예고된 것이었다.

나중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된 라칭거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시절에 25년 동안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복무하면서 한스 큉과 스힐레벡스 등 현대신학자들과 레오나르도 보프 등 해방신학자들을 감찰하고 단속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이 라칭거 추기경이 2005년에 교황이 되었을 때, 보프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교황을 희망하며, 바티칸보다는 리우의 판자촌에서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고 말하면서 “불행하게도 나는 교황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는 않으며, 다만 교황이 지난 25년간 해방신학을 억압했던 것과 같은 행동을 더 이상 보이지 않기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사임 일 년 전에 미국의 레바다 추기경에 이어 페루의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와 절친한 것으로 알려진 뮐러 대주교를 후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루드비크 뮐러(Gerhard Ludwig Müller) 대주교

뮐러 대주교는 베네딕토 16세의 형 게오르그(Geörg)가 아직도 살고 있는 교황의 고향 교구 레겐스부르크의 주교이며, 역대 교황들의 신학적 저작들을 빠짐없이 수집하고 있는 <오페라 옴니아>(Opera Omnia)의 편집인이고, 그동안 400여 편의 신학 논문을 제출한 학자이기도 하다. 뮐러 대주교는 독일 주교회의에서 중도파의 수장이었던 칼 레흐만(Karl Lehmann) 신부에게서 1977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당시 그의 논문은 나치에 저항한 독일 개신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뮐러 대주교는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구티에레즈의 가까운 친구다. 뮐러 대주교는 1998년부터 매년 페루에 가서 구티에레즈의 강의를 들었고, 볼리비아 국경 근처의 농촌 본당에서 농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뮐러 대주교는 2004년 구티에레즈와 함께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해방신학>(On the Side of the Poor: The Theology of Liberation>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뮐러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세계 여타지역으로 확산되면서 ‘해방신학’이라고 알려지게 된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적, 신학적 운동은 제 생각에, 20세기 가톨릭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들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런 발언을 신앙교리성 장관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뭘러 대주교는 그동안 구티에레즈와 나눈 친밀함을 한 번도 숨기지 않았으며, 2008년 페루 교황청립 가톨릭대학교가 수여하는 명예학위를 수여받으며,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구티에레즈의 신학사상이 “완전히 정통신앙과 부합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한편 구티에레즈와 공동으로 지은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해방신학>에서 뮐러 대주교는 “해방신학의 가치는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교회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말했다.

<해방신학 (A Theology of Liberation: History, Politics and Salvation>, 구티에레즈

그는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 운동은 모든 참된 신학적 조류들이 향해 있는 하나의 이미지, 즉 구세주이시자 해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향해 왔다.”고 강조했다. 뮐러 대주교는 해방신학이 ‘가난한 이들을 향하는 복음’이며, 죽음만을 유일한 출구로 여겨야 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을 상기시키고, “서구의 신학운동과 다르게, 해방신학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현실을 추상화시키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을 ‘가난한 이들 안에서’ 보았다.

물론 뮐러 대주교가 신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내정되는 과정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교황청 관료들 사이에서 뮐러 대주교가 “신앙교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메일이 떠돌아다녔다. 바티칸에 정통한 기자로 알려진 존 알렌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런 이메일들이 주장하는 비판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뮐러 대주교가 성모 마리아의 처녀성을 의심하고 있으며, 미사에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분명하게 말하는데 주저하며, “개신교 역시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의 일부”라고 선언하는 등 “의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방적 태도에 반대하는 성 비오 10세회의 알퐁소 드 갈라레타 보좌주교는 “신앙교리성 장관이 이단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성 비오 10세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반발해 프랑스 교회의 르페브르 대주교가 창설했으며, 트리엔트 식 라틴 전례만을 인정하며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간 독립 교회다.

해방신학을 반대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처럼 해방신학에 친화적인 뮐러 대주교를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유임시켰을 뿐 아니라 2014년 1월 12일에는 그를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교황으로 즉위한 지 한 달 만에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시성절차를 다시 승인한 교황으로서 당연한 조치였다. 로메로 대주교는 군사정권이 통치하던 엘살바도르에서 “교회는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면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고, 인권을 옹호하다가 우익 암살단에 의해 살해당한 순교자였다. 2014년 7월에 세계청년대회가 열려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해외순방지로 선택된 곳도 공교롭게 해방신학의 본산지였던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와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가 활동하던 곳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임하고 있는 신앙교리성 장관 뮐러 추기경은 “해방신학을 배격하는 태도는 정치적인 동기가 작용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뮐러 대주교는 교황청에서 해방신학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기 전인 1980년에 산타페 위원회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고한 비밀문서를 폭로했다. 뮐러 대주교는 “이 문서는 미국정부에 해방신학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주문하면서, 해방신학이 가톨릭 신앙공동체를 그리스도교 신앙보다는 공산주의에 가까운 사상들로 물들이고, 사적소유권과 생산적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정치적 무기로 가톨릭교회를 변질시킬 것이라고 비난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뮐러 대주교는 “이 문서의 집필자들은, 그들 자신이 잔혹하고 강력한 군사독재와 소수독재를 저지른 죄인이라는 점에서, 그 뻔뻔스러움이 충격적”이라며 “사유재산과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에 대한 그들의 이해관계가 그리스도교를 대신해버렸다.”고 비판했다. 뮐러 대주교는 오히려 페루의 친구 구티에레즈의 말을 빌어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직접 일하라. 진리는 우리를 가난한 이들에게 더 가까이 가도록 이끈다”(Commit to working directly with the poor. The truth brings us closer to the poor)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라고 전했다.

신앙교리성 장관, 루이스 라다리아 대주교

(그러나 밀러 대주교는 가정과 성 문제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보여왔으며, 이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관용적 입장과 상반되는 측면이 있다. 한편 2017년 뮐러 대주교는 5년의 임기를 마치고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후임 신앙교리성 장관은 예수회 출신의 루이스 라다리아 대주교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교회 안에서는 해방신학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고위성직자들과 사제들, 유력한 평신도들이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얼마전까지 ‘박근혜 정부 사수’를 외치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투신하는 사제들을 ‘해방신학에 오염된 이단자’로 매도하고, “좌익용공사상인 해방신학에 물든 정치사제들은 교회를 떠나라”는 구호를 만들어낸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2013년 9월 “어쩌다가 양들이 목자들을 걱정하는 천주교회가 되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에 광고를 내고 서울대교구 명동성당을 시작으로 서울, 경기, 충청, 강원 지역의 주교좌성당과 심지어 서울 종로구 궁정동 주한교황청대사관 앞에서도 피켓시위를 하며 “나라 망치고 교회 망치는 종북의 온상, 정의구현사제단은 교회를 떠나라”고 외쳐왔다.

그러나 해방신학을 경멸하는 이들이 전거를 삼고 있는 교황청 신앙교리성 문헌들을 꼼꼼이 살펴보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 라칭거(J. Ratzinger) 추기경조차도 해방신학을 일방적으로 매도해 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교황청의 해방신학에 관한 문헌은 크게 두 가지인데, 1984년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자유의 전갈―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과 1986년에 발표된 <자유의 자각―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이다. 신앙교리성 훈령 <자유의 전갈> 1항은 “해방을 향한 민중들의 강력하고도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은, 교회가 면밀히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해명해 주어야 하는, 주요한 시대의 징표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여러 경향으로부터 빌려 온 개념들을 충분한 비판 없이 사용하고 있는 일부 해방신학의 형태에 의하여 초래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신앙을 손상시키는 일탈 또는 일탈의 위험”이 있음을 경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가 “결코 진정한 복음정신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최우선의 선택’에 헌신적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되거나, 비참하고 절박한 인간불행과 불의에 직면해 무관심하거나 애매한 태도를 지키는 자들을 위한 핑계로 이용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만을 문제 삼을 뿐, 해방신학의 전체적인 기조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참고한 것도 아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마르크스주의와 연루된 부분을 빼고는 해방신학의 기본 입장에 동의하고 있다. 교황은 추기경 시절 프란체스카 암브로게티 등과 나눈 인터뷰에서 “해방신학이 등장한 1960년대 가톨릭신앙에게 스며든 소외된 계층들에 대한 우려와 관심은 모든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배양액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더욱 강화되었고 “라틴아메리카에서 해방운동에 참여하는 사목자들과 평신도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가 원하는 방식으로 헌신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가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은 ‘정당정치’라기보다는 “십계명과 복음서를 기반으로 하는 위대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신학은 ‘해방적’이어야 한다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대헌장으로 불리는 <해방신학 (A Theology of Liberation: History, Politics and Salvation>을 쓴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도 않았고, 결코 계급투쟁을 통한 해방을 지향하지도 않았다. 사실 해방신학 논란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반공주의’와 ‘국가안보’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을 둘러싼 실천적인 논란이었다고 말하는 게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4년 당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성명을 발표해 “그리스도인들은 ‘해방신학’이라는 이름에 편승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경계하여야 한다. 성서와 교의를 순전히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과 마르크스의 무산자들을 혼동하며, 폭력적인 계급투쟁으로써 진정한 개혁을 지체시키는 것은 교회의 정통 신앙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정신적인 파멸 위에 새로운 빈곤과 예속을 가져올 뿐이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 한국 교회가 얼마나 해방신학에 대한 오해를 거듭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이 관제언론을 동원해 교황청 훈령의 일부 측면을 확대해석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정치참여에 나서는 사제들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후 2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주교들과 많은 토론을 거친 뒤에 브라질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해방신학이 깊은 신학적 숙고를 통해 새로운 무대를 열었으며, “시의적절하고 유용한 신학”이라고 밝혔다. 그 결론이 1986년 신앙교리성에서 뒤이어 발표한 <자유의 자각>에 실려있다. 이 두 번째 훈령은 ‘가난한 이를 선호하는 사랑’을 통한 ‘교회의 해방 사명’을 잘 드러낸다.

“억압을 당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이 시대 인간의 고뇌에 응답하고자 하는 교회의 결의는 확고하다.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운영은 교회의 직접적인 사명은 아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양심을 밝혀줄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교회에 맡기셨다. 교회의 생명인 하느님의 사랑이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진정한 연대를 이루라고 교회를 재촉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러한 사명에 충실할 때에, 자유의 근원이신 성령께서는 그들 안에 머무르실 것이고, 그들은 자기 가정에서 그리고 자기가 일하고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자유의 자각> 61항)

사실상 모든 신학은 ‘해방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고백하는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에 대한 학문이 ‘신학’이라고 할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처럼 사는 이들에게도 ‘해방’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다면, 이미 신학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하느님은 모든 형태의 노예적 삶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해방신학은 한 대륙의 신학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방의 전갈로 다가온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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