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만일…”이 나를 노예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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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만일…”이 나를 노예로 만든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8.12.31 1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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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8

“나는 누구에게 속하는가? 하느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수많은 일상의 선입견들은 내가 하느님보다 세상에 더 속한다고 제시한다. 조그만 비판 하나가 나를 화나게 하고, 조그만 거부 하나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작은 칭찬 하나가 나의 기운을 돋우고, 작은 성공 하나가 나를 들뜨게 만든다.

나를 북돋거나 나를 밑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데에는 아주 작은 것으로 충분하다. 자주 나는 바다의 일엽편주와 같아서, 완전히 파도의 밥이 된다. 그래서 파도로부터 균형을 잡고, 배가 뒤집히거나 익사하지 않도록 애쓰는 데 모든 시간과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에, 나의 삶은 그저 생존하기 위한 투쟁에 불과하다. 이런 투쟁은 거룩한 투쟁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규정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불안한 투쟁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니? 정말로 너는 나를 사랑하니?”라고 계속 물음을 던지는 한, 나는 세상의 소리에 모든 권력을 부여하고 나 자신을 세상의 굴레에 가두어 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만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말한다: “그래, 만일 네가 외모가 좋고, 똑똑하고, 부유하면 난 너를 사랑해. 만일 네가 좋은 교육, 멋진 일, 그리고 좋은 인맥을 갖고 있다면 난 너를 사랑해. 난 네가 많이 생산하고, 많이 팔고, 많이 구매하면 너를 사랑해.”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조건부 사랑

세상의 사랑에는 끝도 없는 “만일들”이 숨어있다. 이 “만일들”은 나를 노예로 만든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만일들”에 적절하게 응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사랑은 지금도 그리고 항상 조건부일 것이다. 조건부 사랑의 세상에서 나의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고 계속 노력하는 한, 나는 세상이라는 “갈고리에 채워져” 있을 것이다. 노력하고, 실패하고, 그리고 다시 노력하면서. 세상은 중독을 계속 만들어낸다. 세상이 제안하는 것은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중독”은 현대사회에 너무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 상실, 잃어버림을 설명하는 최고의 단어일 것이다. 중독은 우리들을 세상이 ‘자기성취의 열쇠’라고 선언한 것에 집착하도록 만든다. 재물과 권력의 축적, 지위와 찬사의 획득, 먹고 마시는 게걸스러운 소비, 그리고 욕망과 사랑을 구분하지 않는 성적 만족이 자기실현의 요소들이라고 선전하는 것이다. 이런 중독들은 우리의 가장 깊은 요구 대신에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기대치들을 양산해낸다.

세상의 망상들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한, 중독은 우리로 하여금 “먼 나라”에서 헛된 탐색을 하도록 단죄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아에 대한 의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채 끝없는 환멸에 직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중독이 늘어갈 때, 우리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방황한다. 중독된 삶은 “먼 나라”에서 살아가는 삶을 적절히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시점에서 구원에 대한 우리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탕자의 "아니요"라는 반란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무조건의 사랑을 찾을 때마다 나는 탕자이다. 왜 나는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는 자리를 계속 무시하고 다른 곳에서 그 사랑을 찾으려고 고집하는가? 나를 하느님의 아이라고, 나의 아버지의 ‘사랑받는 이’라고 부르는 집에서 왜 나는 계속 떠나고 있는가? 나의 건강, 나의 지성과 정서적인 선물 등 하느님의 선물들을 계속 받아 그것들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그래서 인정과 칭찬을 받는 데에 계속 사용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 선물들을 사용하기보다 상을 받기 위해 계속 경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나는 끝없이 놀라고 있다.

그렇다, 나는 자주 선물들을 “먼 나라”로 가지고 가서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세상을 파괴시키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 마치 나 자신과 나의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 없으며, 나의 삶은 스스로 만들 수 있고, 나는 완전히 독립하고 싶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 같다. 이런 상황 아래에는 거대한 반란이,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에 근본적으로 “아니오” 하고, “하느님, 난 당신이 죽었으면 해요.”라는, 말하지 않는 저주가 자리하고 있다.

탕자의 “아니오”는 아담의 원초적인 반란을 투사한다.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를 존재케 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아담의 거부를. 그것은 나를 동산 바깥으로, 생명의 나무를 만질 수 없는 바깥으로 밀어내는 반란이다. 그것은 나를 “먼 나라”로 쫓아버리는 반란이다.

하느님은 결코 손을 감추지 않는다

돌아온 작은 아들의 모습을 그린 렘브란트의 작품을 다시 바라보면서, 이제 나는 단순히 빗나간 아이에 대한 연민어린 태도보다 훨씬 많은 것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내가 보는 위대한 사건은 거대한 반란의 종말이다.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의 반란은 용서받고,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영원한 생명의 축복이 회복되었다. 지금 나는 아버지의 손들이 항상 뻗쳐 있었음을 본다. 비록 그 손들이 놓일 어깨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그 손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하느님은 결코 손을 감추지 않는다. 그분의 축복을 절대로 철회하지 않는다. 아들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강제로 집에 머물게 할 수 없다. 아버지는 사랑받는 아들에게 사랑을 받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분은 아들을 자유롭게 가도록 허락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과 아들 둘 다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고 알았어도 허락했다. 아들을 무슨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집에 머물도록 하지 않았던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이었다. 아들이 생명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명을 찾도록 허용한 것은 그분의 사랑이었다.

여기에서 나의 삶의 신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너무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로이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곳에는 축복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축복을 떠나고 계속 떠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손을 뻗쳐 나를 찾고 있다. 돌아오는 나를 받아들이고 내 귀에 “너는 나의 사랑받는 아이, 내 사랑이 너에게 머문다.”라고 다시 속삭이기 위하여 그렇게 손을 내밀고 있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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