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칼럼 유대칠 칼럼
해탈하자, 고통받는 이에게 가기 위하여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37]

‘해탈(解脫)’이란 무엇일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해탈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아집(我執)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움이다. 욕심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자신에게 좋은 것만 본다. 자신에게 좋지 않으면 생각도 않는다.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욕심낸다. 그러니 같은 것을 욕심내는 이들 사이엔 거짓이 생기고 다툼이 생긴다. 그리고 그 싸움의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피해자가 생겨도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 욕심을 챙기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아집에 빠져 살아가는 이는 자신의 욕심이 자신을 지배한다. 종속된다. 해탈이란 바로 이러한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움이다.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움이다. 이렇게 자유로울 때, 하느님이 창조하신 있는 그대로의 세상,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불교에선 탐욕과 아집으로 살아가면 끝없이 업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신적 존재의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의 힘, 즉 반야(般若)의 증득으로 이루어진다. 쉽게 말해서 지혜로워야 한다. 욕심을 이기고 그 아집으로 벗어난 참된 자유, 해탈을 누리기 위해 말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해탈, 그리스도교인도 해탈해야 한다. 자기 아집의 눈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느님은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힐 정도로 작은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하느님이시다. 너무나 분명한 신학적 사실은 나의 아집 외부에 진정한 하느님이 정말 제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계시다는 사실이다. 나의 아집으로 하느님을 따라갈 수 없고 끝없이 왜곡하고 왜곡한다. 왜곡된 하느님, 아집에 사로잡힌 하느님은 모두를 위한 하느님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한 하느님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다.

어디 하느님만 그런 분이신가? 우리 가까이 형제자매 모두 그런 존재들이다. 나의 아집으로 사로잡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쉽게 나는 너를 모두 다 안다고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나에게 보인 것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나의 아집 넘어 온전히 그로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느님도 인간도 모두 나의 아집에 사로잡힐 존재들이 아니다. 그 아집은 오히려 그의 위대한 존재성을 아집 속 초라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 버린다. 작아져 버린 하느님이 되고 초라해져 버린 형제자매가 된다.

해탈, 그것은 아집을 벗어남이다. 진정 참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기 위해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집에서 벗어나면 하느님은 우리의 아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우리의 이성에 들어오지 못하지만, 오히려 우리의 제대로 된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실 것이다. 아니다. 우리 자신이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있다가 해탈 이후 진정 그 사랑받음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해탈하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이 있으신지 느껴질 것이다. 해탈하면 필요 없던 잡초의 아름다움도 그 신성함도 보게 될 것이고 흔하디흔하게 마주하던 이웃의 가치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의 아픔 앞에서 나와 무관하다 등 돌리고 나의 욕심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게 될 것이고, 있는 그대로 그 아픔의 옆에서 달려가게 될 것이다. 나의 아집을 지우고 그를 보면 그의 아픔이 있는 그대로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주는 이는 모자람이 없지만 못 본 체하는 자는 많은 저주를 받는다."(잠언 28,27)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선하심은 하늘에서 기적으로 내로는 것이 아니라, 더 가진 이가 덜 가진 이에게 채워줌으로 구현된다 했다. 아집을 버리고 세상을 보면 기쁘게 나의 것을 내어 줌으로 그의 것이 되게 한다. 어찌 보면 나의 것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한단 말이다. 그 가운데 하느님의 선하심이 드러나게 된다.

칼 라너는 “각 사람은 온갖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이 이웃사랑을 통하여 유일회적 인간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 한낱 인간이란 종류의 보통집단이 아닌 성인 공동체 실천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아집을 버리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면 그 사랑의 실천으로 우린 한낱 인간이 모인 보통집단이 아니라, 성인공동체가 된단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아집에서 벗어나 마주하면 말이다. 해탈하여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게 되면, 있는 그대로의 그의 아픔을 안아주고 사랑하게 되면, 그저 인간의 모임이 아니라 성인공동체가 된다.

나의 아집 속에 하느님도 예수님도 온전히 있지 않게 된다. 나의 아집 속에 보면 이 사회의 부조리한 폭력 속에서 죽어간 이들의 아픔은 그냥 남의 슬픔이 된다. 남의 슬픔은 그냥 외롭게 둔다. 나의 아집 속에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일까?

하느님이시기에 어떤 고난도 죽음도 필요 없는 분이 고난과 죽음을 받으러 이 땅에 내려오신 날이다. 당신 자신에 대해선 어떤 이기심도 부리지 않고 온전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은 분이 이 땅에 오신 날이다. 그는 아집 속에서 우리를 보지 않았다. 오직 우리의 부족과 아픔을 보셨고, 스스로 우리와 우리가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날이다. 그 예수의 사랑이 우리 사랑의 원형이 되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아집, 버리자. 해탈하자.

화력발전소에서 지하철에서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죽어간 그 외로운 죽음을 외롭게 하지 말자. 사실, 고통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어찌 나누어져 그 고통이 덜어지겠는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 그들의 가족에게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나누자. 나누어 사라지지 않아도 나누자. 당장 해결되지 않아도 소리치자! 그 고통이 사라지는 날, 이 땅에서 그런 부조리한 고통이 사라지는 날을 향하여 그 고통 속에서 외롭게 울고 있는 그들의 분노, 그 분노의 옆에 서자. 더불어 있자.

지금 당장 나의 삶 동안 해결되지 않아도! 이런 저런 나의 욕심으로 따지지 말고 그냥 옆에 서자! 그 외로움에 하느님이 내미는 손이 되어 그들의 옆에 이런 저런 따지지 말고 다가가자! 아집! 그딴 거 버리자! 그리고 다가가자! 함께 있자!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가톨릭일꾼 기사는 상업적 용도 아니라면 출처를 밝히고 누구나 퍼갈 수 있음>

유대칠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