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사랑의 소리에 귀머거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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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사랑의 소리에 귀머거리가 되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8.12.23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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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7

하느님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일은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는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 훨씬 더 큰 사건이다. 그것은 나의 온 존재가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영적 실재를 부인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영원한 포옹으로 나를 안전하게 붙잡아 주신다는 사실을, 내가 참으로 하느님의 손바닥에 새겨지고 그 그늘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남몰래 나를 만드시고, 나를 땅 깊은 곳에서 빚으셨으며, 모태에서 나의 뼈대를 짜셨다”(시편 139,15-16)는 진리를 무시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집을 떠나는 것은 마치 내가 아직껏 집을 갖고 있지 못해 집을 찾기 위하여 반드시 멀리 넓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

집은 나의 존재의 핵심으로서 “너는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아이”라고 말씀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이다. 이 소리는 첫 번째 아담에게 생명을 주었던 것과 같은 소리이고,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에게 말했던 소리이다. 이 똑같은 소리가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말하고, 그들이 빛 속에 머물며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도록 자유롭게 해준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과거에도 나에게 말했고 지금도 계속 나에게 말한다.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말하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 사랑의 소리이고,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생명과 사랑이 배어나온다. 그 소리를 들을 때, 나는 하느님과 함께 집에 있으며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나는 어둠의 골짜기를 걸을 수 있고, 아무런 악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시편 23,4). 사랑받는 자로서, 나는 “아픈 이를 치료하고,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며, 나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고,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 “거저 받았으므로” 나는 “거저 줄 수”(마태 10,8) 있다.

사랑받는 자로서, 나는 거부의 두려움이나 인정의 필요 없이 대면하고 위로하며 교훈을 주고 격려할 수 있다. 사랑받는 자로서, 나는 복수하려는 욕구 없이 박해를 견딜 수 있으며 칭찬을 나의 선함의 증거로 사용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랑받는 자로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으며 고문을 당하고 죽을 수 있다. 사랑받는 자로서, 나는 자유롭게 살고 생명을 줄 수 있으며, 생명을 주면서 기꺼이 죽을 수 있다.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예수님은 요르단 강과 타볼 산에서 들었던 그 같은 소리가 또한 나에게도 들릴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또한 예수님은 그분이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집에 있는 것처럼 나도 똑같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명료하게 말한다.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예수님은 말한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6-19). 

이 말씀들은 내가 참으로 머무는 자리, 나의 진정한 거처, 나의 진정한 집을 드러내준다. 신앙이란, 집이 항상 그곳에 있어왔고 항상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근본적인 신뢰이다. 다소 억척스럽게 보이는 아버지의 손이 영원히 지속되는 거룩한 축복으로 돌아온 아들의 어깨위에 놓여 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나를 부르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 번 집을 떠난다. 나는 축복의 손을 떨쳐버리고 사랑을 찾아 먼 곳으로 도망쳐 버린다! 이것이 나의 삶에 큰 비극이요 나의 여정 중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이다. 어떻게 해서든 나는 ‘사랑하는 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점점 더 귀머거리가 되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떠난다. 그리고 집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으리라는 희망으로 필사적인 도피를 감행한다.

처음에 보면 이런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처럼 들린다. 내가 들어야 할 모든 것이 들릴 수 있는 그 자리를 내가 왜 떠나야 하는 가? 이 질문에 대해 더 생각할수록, 나는 사랑의 진실한 소리는 나의 존재 안에 있는 가장 숨겨진 자리에서 나에게 말하고 있는 매우 부드럽고 다정한 소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나에게 억지로 주의를 요구하는 사납고 거센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많이 울고 많은 죽음을 겪은 후 거의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소리이다. 이 소리는 자신을 만지도록 내어 맡기는 이들만 들을 수 있다.

하느님의 축복하는 손을 느끼는 것과 나에게 ‘사랑하는 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은 하나요 똑같은 일이다. 이것은 예언자 엘리야에게도 분명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산에 서있다. 처음에 그곳에는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속에 계시지 않았다. 그러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하느님은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이에게는 부드러운 미풍으로 다른 이들에게는 작은 소리로 들렸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부드러움 가운데에서, 소리는 만짐이었고 만짐은 소리였다(1열왕 19,11-13).

사랑을 거부하고 먼 나라에 살기를 희망하는...

그러나 많은 다른 소리들이 있다. 시끄러운 소리들, 약속으로 가득 하고 매우 유혹적인 소리들이 있다. 이런 소리들은 말한다, “나가서 네가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 예수님은 그분께서 ‘사랑하는 이’라고 부른 소리를 들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광야로 이끌려 나가 다른 소리들을 듣는다. 그 소리들은 그분이 성공하고 인기 있고 강력한 존재가 되어야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라고 한다.

이와 똑같은 소리들이 나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 소리들은 항상 그곳에 있다. 그리고 항상 그것들은 내가 나 자신의 선함에 대해 질문하고 나의 가치를 의심하는 내적 자리 안에 파고 들어온다. 그 소리들은 내가 단호하게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 소리들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사랑받을 만하다는 것을 증명하길 바란다. 그리고 인정을 얻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하라고 계속 밀어댄다.

그 소리들은 사랑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선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나는 나를 ‘사랑받는 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대한 믿음을 잃을 때마다 집을 떠나고, 내가 그렇게나 갈망하는 사랑을 얻기 위해 다양한 길들을 제시하는 소리들을 따라간다.

거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된 순간부터, 나는 그 소리들을 들었고, 그 소리들은 그 이후 나와 함께 있다. 그 소리들은 나의 부모, 친구, 교사, 동료를 통하여 나에게 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소리들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대중언론 매체를 통하여 오고 여전히 지금도 오고 있다. 그리고 소리들은 말한다:

“네가 착한 소년이라는 것을 나에게 보여줘. 너는 친구보다 더 잘나야 해! 네 성적은 어떠냐? 그 성적을 학교 마칠 때까지 유지해! 난 네가 네 힘으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 확실히 바란다! 너의 인맥은 어떤가? 너는 정말로 이런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으니? 이 우승컵들은 확실히 네가 얼마나 탁월한 선수인지 보여주지! 너의 약함을 보이지 마, 그러면 넌 이용당할 거야! 너는 노후 준비를 다 하고 있니? 네가 생산력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너한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야! 죽으면 모든 게 끝장이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소리와 늘 함께 있는 한, 이런 질문들과 충고들은 전혀 나를 해칠 수 없다. 부모, 친구, 교사,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나에게 말하는 사람들조차 대부분은 꽤 성심어린 관심을 보인다. 그들의 경고와 충고는 좋은 의도를 담고 있다. 실상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과 관심은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적 차원에서 제한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첫째 사랑의 소리를 잊어버릴 때, 사람들의 이 성실한 제의들은 쉽사리 나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나를 “먼 나라”로 밀어 넣게 된다.

이런 일이 언제 벌어지는지 아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분노, 쓰라림과 후회, 질투, 복수의 욕구, 탐욕, 적대감, 그리고 경쟁심 따위가 바로 내가 집을 떠나고 있다는 분명한 징표들이다. 그런 일은 매우 쉽게 일어난다. 내 마음속에서 순간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을 둘 때에 나는 하루 동안 실제로 이런 어두운 감정들, 정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때가 매우 적다는 것을 당혹스럽게 발견하게 된다.

온전히 깨닫기도 전에 끝없이 낡은 이 함정에 떨어지면서, 나는 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거부하거나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지 계속 의아해하고 있다.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는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 나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그리고 세상이

나를 함부로 다룬다고 속앓이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의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부자가 되고 권력가가 되고 매우 유명한 인물이 되는 공상에 잠긴다. 이 모든 정신적인 놀이들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지 나 자신에게 드러내준다.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비난받고, 소외 되고, 무시당하고, 관심에서 제외되고, 박해받고, 살해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나 자신을 방어하고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략들을 끊임없이 고안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나의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멀리 멀리 떠나가고 “먼 나라”에 살기로 선택한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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