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티드,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편지
상태바
아리스티드,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편지
  • 한상봉
  • 승인 2018.12.23 22: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난한 휴머니즘>,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이후, 2007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신부. 해방신학의 살아있는 모범이라 불리는 아리스티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아이티의 대통령이었고, 군사쿠데타로 물러나기를 반복하며, 2000년에는 무려 92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다시 대통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1퍼센트 부자들을 위한 독재자 뒤발리에를 용기 있게 비판하고 개인의 존엄을 드높인 아이티 민주주의의 희망입니다.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집권 기간은 5년 8개월에 불과했지만 군대를 해산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거부하고, 교육과 보건의 질을 높였으며, 최저임금을 두 배로 인상하는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아리스티드 재단’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 혁명을 돕고 있고, 1986년 설립된 ‘라팡미 셀라비’를 통해 아이티의 미래인 거리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가 세계인에게 ‘가난한 이들의 존엄성’을 알리는 아홉 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게 <가난한 휴머니즘>이란 책입니다.

 

 

하느님은 볼 수 없지만 눈앞의 당신은...

그는 우리가 하느님을 입에 담을 때, 그분은 사랑의 원천, 정의의 원천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자와 남자, 흑인과 백인, 어린아이와 어른, 영혼과 육체, 과거와 미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살리는 그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느끼기는 하지만 만질 수 없는 어떤 것, 들리기는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말을 넘어서는 것, 우리가 어떤 단어를 고르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리스티드는 “우리 앞에 있는 것에서 시작하자.”고 합니다. 하느님을 볼 수는 없지만,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있는 아이와 여인, 사내는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속적인 세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압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경험하며, 정의를 감지하고 찾아 나섭니다.”

아리스티드는 대통령 직을 수행할 때도 그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도 한결같이 ‘인간의 존엄성’에 주목합니다. 그는 다른 아이티의 국민들처럼 여전히 가난했지만,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 앞에 나갔더니 한 여성이 도로에 지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몸을 구부려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녀는 땅을 내리치며 말했죠. “당신이 저를 이렇게 존엄과 존경으로 대해 주시니, 오늘밤 이 콘크리트 바닥이 어떤 매트리스보다 훨씬 더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필요한 집과 일자리, 학교 등록금을 대 줄 만큼의 돈은 없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응당 받아야 할 존경과 존엄으로 서로를 대할 만큼의 인간다움은 우리에게 충분히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속고 있는 때를 아는 것처럼 자신이 존중받고 있을 때를 압니다.”

하느님은 사고파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사랑은 공허하지 않습니다. “뱃속에도 평화를, 그리고 마음에도 평화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심각한 경제적 생태적 문제에 직면한 세계에서 정말 필요한 답이 종교에 있지 않을까 묻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나는 보았다. 그들의 울부짖음을 나는 들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고통 받는 백성들은 그런 분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그 답을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교회와 성당과 사원을 가득 채운 환전상들의 소음과 야단법석 위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란 아주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고파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정의입니다. 평화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교회는 ‘빌어먹는 존재’이지만, 이제는 ‘벌어’먹겠다고 나서는 까닭입니다. 사실상 돈 안 되는 사업은 접어두고 대형병원과 학교, 사립유치원, 요양원에 납골당까지 사명이 사업이 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하느님께 빌고 빌어서 먹고 살아야 겸손해지고, 신자들의 자발적 헌금에 의존해야 ‘하느님 백성’ 귀한 줄 압니다. 가난한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심정을 알고,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환대의 기쁨을 누립니다. 하느님이 사람과 흥정하지 않듯이, 부모는 자식들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보상 없이 사랑하고, 대가 없이 나눕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사랑하는 능력이 신앙입니다.

 

 

아기를 사랑으로 돌보는 엄마처럼

99퍼센트의 가난한 아이티 민중을 위해 마지막 남은 권위의 표상인 로만칼라를 내려놓은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하느님은 여성”이라고 말합니다. 인생과 신앙에서 품어 안는 사랑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여성이 존중받는 곳이면 어디나 하느님이 얼굴이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존중받는 곳이면 어디나 하느님의 얼굴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인간다움이며, 그가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광의 하느님일 뿐 아니라 고난의 하느님이기도 합니다. 불행이 닥쳐와도 그의 평화로운 위엄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냥 미소 짓는 아이들처럼, 먹을 게 없을 때에도 아기를 사랑으로 돌보는 엄마처럼,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능력을 잃지 않습니다. 폭력에 맞서 용기 있는 행동을 하게 되고, 아직 처벌받지 않은 범죄에 정당한 심판을 요구하는 능력 말입니다.”

아리스티드는 ‘존엄한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난과 가난한 이들이 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는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가난한 시대에 부자로 살기를 거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직자들이 사업 하고, 신자들이 뒷돈을 대는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앉아 있을 곳을 잃어버립니다. 성당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남루한 교우들을 생각하면, 성작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고 나섰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어느 교부 이야기가 눈물겹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제, 남루한 대통령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겨울입니다. 어느 여인이 해산할 방을 구하지 못해 짐승의 거처에서 메시아를 낳았다는 성탄절 이야기를 요란한 징글벨이 덮어버리는 겨울입니다. 

* 이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8년 12월-2019년 1월호(통권 16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가톨릭일꾼> 종이신문을 구독 신청하려면 아래 배너를 클릭하세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