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종교심성으로 더 풍부해진 그리스도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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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종교심성으로 더 풍부해진 그리스도교 신앙
  • 세바스티안 카펜 신부
  • 승인 2018.12.1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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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문화적 변혁-4
사진출처=pixabay.com

어떠한 믿음도 역사적 현실 안에 실제로 표현되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믿음은 억압받는 계층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현실 속에서 그 표현을 구체화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계층은 정치적 행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그들의 믿음을 이론적인 무기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정치적 행동을 위한 여건이 조성되지 못할 때 정치적 무기력은 종교 라는 도피처 안에 그 출구를 찾게 될 것이다. 착취와 지배의 상황을 도저히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억압받는 계층은 그 과제를 하느님 편의 과제로 돌려버릴 것이다.

아시아의 현실은 총체적인 따라서 문화적인 변혁을 필요로 하면서도 그러한 변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집단요원의 부재상황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당면하고 있는 도전은 민중의 의식과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변화를 위한 힘을 어떻게 활성화시키는가 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새로운 문화운동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예수가 시작하였던 새로운 문화운동은 아시아가 과거에 전개하였던 저항운동과 매우 흡사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해방적 문화의 창조에 예수의 삶과 메시지가 특별히 기여하는 바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공식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것보다 복음의 예수가 그들의 삶에 보다 더 적합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오히려 교회의 전통과 신학이 예수의 메시지와 모습을 모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역사적 예수와의 만남은 정의를 위한 싸움에 참여하도록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시아가 필요로 하는 의식의 혁명에 예수의 삶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묻는 것이다.

예수는 결코 사회이론가도, 사회변화에 권위 있는 전략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예언자로서의 삶으로 역사의 길 자체를 변화시켰던 예수는 진부한 세계관과 신앙, 사회풍조를 벗어나 인간화 작업을 추구하는 아시아의 잠재력을 활성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주기적 역사관에서 참여적 역사관으로

주기적 역사관은 우주진화론에 근거를 두고 형성되어 왔다. 이 우주과정론에서 불가피한 결정론의 원칙이 나온다. 결정론에서 때는 삶에 관한 인간의 태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들거나 미화시키게 된다.

우주의 끊임없는 창조-파괴 과정은 과거의 성취를 무의미하게 하므로 과거에 대한 무관심이 형성된다. 또 한편으로 현재의 점진적인 퇴보는 과거를 황금시대로 간주하는 믿음을 낳게 한다. 옛 습관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과거사에 대한 향수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세상의 창조와 자신의 창조에 필요한 잠재력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아시아는 역사에 대한 주기적 관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억압받는 계층의 매일의 싸움을 통해서, 또한 식민주의에 대한 싸움을 계속해 감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오직 조직화된 행동을 통해서 민중은 자신들이 되풀이되는 우주의 체바퀴 속에서 단순한 톱니가 아니라 그들 미래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의 삶은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강화시킨다. 하느님을 체험한 예언자들은 인간을 불구자로 만들고 격하시키는 모든 것들을 단호히 부인한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소모시키는 불길을 삼켜버리는 것과 같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힘 자체가 되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도피에서 벗어나 도약을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에게 해방은 삶과 역사에서 도피함을 의미한다. 현재의 실존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자체가 인간의 소외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므로 도피적인 관점에서 해방이란 삶과 역사를 떠나 하느님과의 일치를 즐기는 천국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변화를 위한 집단행동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새로운 해방의 개념이 요구되고 있다. 과거와 불연속이 아니라 우리의 세상과 역사 속에 뿌리박은 예수의 하느님 통치관은 가장 적절한 해방의 개념이다. “새로운 하늘과 땅”은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으로 가득찬 우리 하늘과 땅 이외에 다른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창조에서 좋은 것은 무엇이나 보존하고 죄에 물든 것은 모두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우주론적 신앙관에서 윤리적 신앙관으로

대부분의 아시아 종교는 진정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부족하다. 우주현상을 끊임없는 감화와 분해의 연속으로 보는 우주론적 관점은 개인의 절대적 가치관을 박탈해 버린다. 인격형성에 있어 핵심부분인 자기결정과 자기초월성은 우주의 진화와 퇴화의 결정론에 희생된다. 가정이나 부족, 마을 등 이미 결정된 사회구조를 보존하기 위한 특정한 도덕성이 여기에 덧붙여진다. 아시아의 종교는 세계시민이라는 도덕성과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없다. 여기에 바로 현대 아시아의 도덕적 위기의 뿌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편적 사랑의 도덕성을 창조하기 위한 충동은 때로 새로운 문화운동인 불교, 힌두교 운동 혹은 공자와 같은 성인이나 현인들을 통하여 드러난다. 예수의 전통은 이러한 종교와 새로운 문화운동 안의 잠재력을 재발견하고 해방시키는 자극에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수 전통에서 하느님은 자신을 사랑으로 드러내며 인간이 서로 사랑하도록 부르고 있다. 그는 성난 하느님이며 허약한 형제들을 짓밟은 이들에게 화를 내는 분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체험은 뿌리를 뽑거나 심는 일, 폐기와 건설을 할 수 있는 윤리적 힘으로 채워져야 한다. 창조적 사랑이라는 윤리적 도덕성을 적절하게 닦음으로써만 아시아의 종교는 기존 사회조건의 분열적이고 비인간적인 측면으로부터 아시아인들이 도약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 구원에서 공동체 구원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오직 부족 사회에만 진정한 공동체 의식이 존재했다고 한다. 공동체 의식은 계층사회나 봉건 혹은 자본주의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역사와 인간실존에 관한 주기적인 관점은 개인과 공동체 중 어느 하나를 희생하지 않고 모두에 가치를 두는 진정한 공동체 의식의 형성을 방해하는 것이다.

예수가 상속하였던 히브리 민족의 공동체적 운명관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할 때의 공동체 체험과, 약속된 땅으로 향하는 공동체 탈출의 행동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체험의 추진력은 구원이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구원으로서 인류의 궁극적 화해와 재결합이라는 관점이었다. 하느님 통치의 사업은 공동체를 위하여 개인을 희생하거나 개인을 위하여 공동체를 희생하지 않는 세계적 공동체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문화에서 자유의 문화로

서구사회가 쾌락과 이익, 권력 추구의 문화를 만들었다면 아시아는 어느 의미에서는 전통, 관계, 영에 대한 두려움의 문화를 창조하였다. 두려움에 휩싸이면 인간의 정신은 시들고 창조력은 죽어버린다. 두려움과 억압의 분위기 속에서 예술이나 문학은 피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 두려움의 사조는 소외된 문화계층에 훨씬 적고 원주민들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수의 메시지는 이 두려움의 문화와 정반대이다. 안식일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선포함으로서 그는 인간이 만들어낸 법칙의 위반으로 인해 비롯되는 죄의 두려움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사랑과 형재애와 아름다움을 즐기는 기쁨을 인간에게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전통은 하느님의 풍요로움을 고갈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하여 더 풍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절대적 타존재의 내재성

예수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으나 세상을 초월한다. 즉 하느님은 불의와 미움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로서 세상을 초월한다. 또한 같은 이유로 하느님은 인간의 충만함과 자유를 확인하는 존재로서 세상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적 체험은 신을 인간과 동일시하는 경향으로 치닫기 쉬운데 이 때의 신은 인간과 자연의 세계 밖에 있는 인격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 현존하는 인격적 신으로서 체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원주민의 고유 종교는 자연과 사회 안에 존재론적으로 내재하는 신을 강조한다. 민중의 우주론적 종교와 지식계층의 가지론적 종교는 모두 명칭, 형태의 세계와 함께 있는 존재로서 신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하에서 하느님은 인격적이거나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초인격적 존재이며 자연 속에 뿐만 아니라 자연자체이다. 이러한 전통에의 개방성은 예수의 제자들로 하여금 성경의 윤리적 신을 세상의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절대적인 존재로 체험하게 하였다.

내재하는 자아의 발견

민중종교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추구하는 반면 지식인들은 인간 정신의 깊은 내부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그 목적은 자신의 자아를 넘어 초월적인(절대적인) 자아의 발견이다. 이러한 목표와 금욕주의가 통합되어 요가가 생겨났다. 내적 자아의 추구는 욕망과 미움과 폭력의 독재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수단으로 쓰여지는 한 긍정적인 가치관을 지닐 수 있다.

또한 인간화를 위한 혁명적인 실천에 필요한 심리적 여건을 창조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이탈에 관한 요가적 이상은 하느님의 왕국과 정의에 대한 투신의 영성 안에 흡수될 수 있다.

어머니인 대지

예수의 전통에 있어 자연은 하느님 역사의 대상이며(“하느님은 들의 꽃을 입히시며…), 창세기에서처럼 인간행동의 대상이기도 하다.

자연은 매우 남성적이고 호전적이며 너무 멀리 있다. 황량한 팔레스타인 지방은 유다인들에게 땅에 대한 친밀한 감각을 주지 못하였다.

아시아인들은 땅이 위대한 어머니이며 모든 창조의 움이라고 생각한다. 땅은 모든 비옥함의 원천이다. 땅의 핏줄을 흐르는 똑같은 생명력이 인간의 육체 안에서 고동을 치고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어머니인 대지의 고통 속에서 신을 느끼기 위하여 숲 속의 고독에 파묻혔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자연은 상식적인 가치관보다 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자본주의적 상품의 생산은 이러한 자연의 가치를 교환가치의 총합으로 격하시킨다. 그러므로 땅에 대한 전통적이고 심미적이며 신비적인 의미를 다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아시아의 종교적 심성은 예수의 전통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다. 아시아의 종교는 수천년 동안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회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 왔으며, 따라서 우주적이고 인간적이며 또한 신적인 감각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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