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에 대한 첫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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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에 대한 첫 인상
  • 로살리 뤼글 편집
  • 승인 2016.05.1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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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살리 뤼글의 <도로시 데이>-2
도로시 데이

도로시 데이를 만나면서 나는 실제 세계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가톨릭 학교가 보통 만들어내는 것은 … 가톨릭적인 삶을 추구하는데 있어 한 가지 차원에만 빠지는 그런 모습의 삶이다. 그러므로 도로시를 만나고, 의식의 명료화를 추구하는 금요일의 원탁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은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는 일이었다. 난 그 해 여름을 다 그곳에서 보냈다.

나는 무엇보다도 도로시의 해박한 지식에 감명을 받았다. 생각들에 대해 토론해 보고 비판에 응답하는 능력 등. 그러나 나는 또한 그가 지녔던 유머감각을 사랑했다! 한 번은 어느 본당에서 두 분의 부인들이 입을 모아 도로시에게 성인이라고 하면서 온갖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도로시는 그들에게 “거짓말”이라고 말했다고 우리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

- 져스틴 레스페란스 (디트로이트에서 온 가톨릭일꾼운동의 초기 일꾼)


나는 모트가에서 도로시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키가 컸고 겉모습은 매끈하지 않았으나, 준엄한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고유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약간 딱딱하고 냉담한 느낌을 주었다. 엄숙하고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지배하지 않고 전혀 거칠거나 무자비하지 않은 집안의 어머니 같았고, 부드럽고 정교하며 사랑스럽고 관대한 여성이었다. 그곳에서 사무실 일을 약간 도우며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큰 경험이었다.

도로시는 철저하게 일을 했다. 그는 여기에 공부하러 온 신학생들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쏟았다. 도로시 데이와 얘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데이는 그들에게 퉁명스럽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긴 토론을 한다든가 등의 일에 주의를 뺏기지 않았다. 그는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부엌일을 하고 스프 급식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등. … 그는 항상 분주했다. 난 그가 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그때 대학생이고 신학생이었던 나는 어디를 방문할까, 하면서 재밋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의 삶의 리듬은 충분히 전염성이 있었다.

- 미네아폴리스 출신인 하베이 이건 신부 (모트가 시절에 신학생으로 왔다)


나는 1936년 5월에 도로시 데이가 말하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나는 가톨릭일꾼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난 그의 유머 감각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옮기 쉽고 매력적인 그의 웃음에도. 난 그때 이렇게 말했다, “이 여성은 삶에서 엄청난 재미를 맛보고 있네. 나도 그렇게 해봐야겠어. 그러니 그와 비슷하게 살아봐야겠어.”

그때 가톨릭일꾼은 모트가 115번지에 있었다. 그곳은 차이나타운의 북쪽, 작은 이태리 구역이었다. 빈민가였고, 빈대와 쥐가 득실거리는 낡은 집들이 즐비했다. 상황은 꽤 질퍽거리고 남루했다. 인격주의, 혹은 개인적인 책임의 개념에 따르면, 당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수 없었다. 단지 당신 자신이 좋은 표양을 보이며 살면, 사람들이 당신의 표양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좋은 일을 시작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는 진행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어져 잠만 잤고 잠자리도 치우지 않았다. 그들은 청소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매우 간단한 규칙들을 써 붙이겠다고 결정했다. 첫 번째 규칙은 “모든 사람은 9시까지 일어난다.”였다. 두 번째는, “모두가 각자 잠자리를 정리한다.” 세 번째는, “모두가 순서대로 청소한다.”였다.

그런데 내 방 동료는 (난 그에게서 꽤 많은 결핵약을 얻었다) 바우어리에서 온 매력적인 아일랜드 사람인 죤 그리핀이었는데,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는 환대의 집에 오래 있었고 다른 이들보다 꽤 이론을 섭렵하고 있었던 친구였다. 그는 이 규칙들이 신성한 ‘인격주의’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도로시 데이에게 달려갔고, 데이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규칙들을 치워버리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러면서 그곳의 삶의 형태가 무정부식 독재주의라고 결론을 지었다. 거기에는 어떤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결정방식이 없었다. 도로시가 모든 결정들을 내렸다. 우리는 그를 ‘여 수도원장’이라고 불렀다. 그가 규칙을 정하거나 철회했다.

데이는 강한 의지의 여성이었다. 그런 철학으로 일꾼운동을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철학은 인격주의와 개인적인 책임감에 대해 말한다. 데이는 권위주의적이었으나,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때와 일이 엉망이 되기 전에 개입해야 할 때를 잘 감지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개입할 때에 도로시 데이는 막강한 힘을 갖고 개입할 수 있었다.

도로시와 나는 많은 논쟁을 했다. 그는 나를 고집쟁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나는 너무나 논쟁적이고 사사건건 찬성하지 않는, 반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도로시 데이를 근본적으로 그리고 가장 뚜렷하게 영웅적인 덕을 가진 여성으로 기억한다. 또한 그에게서는 지적인 측면도 보였고, 그다지 예민하진 않지만 낭만적인 농업주의와 극단의 평화주의 그리고 약간의 무정부주의적인 특색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머리 속에서 떠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복잡한 여성이었다.

- 죤 코트, 가톨릭 개종자이며 사회주의자 (하버드 졸업 후 일꾼에 합류했다)


우리는 매일 밤 만과를 드리고 매일 아침미사에 가곤했다. 도로시는 환대의 집에 있는 몇몇 남자들이 매일 미사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밤늦게 깨어있고 아침 늦게까지 자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데이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이교도들에게 보내는 서간”이라고 했다. 데이가 꾸짖을 때는 매우 솜씨 좋게 했다. 그것은 탕, 탕, 탕, 강타였고 짧고 달콤했다! 정말로. 그 편지 이후 아무도 미사를 거르지 않았다!

- 캐더린 멜라(시카고에서 온 초기 가톨릭일꾼)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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