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작은 아들의 탈향-철저한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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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작은 아들의 탈향-철저한 거부
  • 헨리 나웬
  • 승인 2018.12.19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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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6

[작은 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렘브란트의 이 그림의 제목은 <잃었던 아들의 돌아옴>이다. “돌아옴” 이란 말에는 "떠남"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돌아오는 것은 집을 떠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나간 후 다시 오는 것이다. 집에서 아들을 환영하는 아버지는 너무나 기쁘다.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잃었던 아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잃었던 아들이 돌아와 환영하는 이 커다란 기쁨은 이전에 느꼈던 엄청난 슬픔을 감추고 있다. 찾는다는 것은 배경에 잃어버리는 것을, 돌아온다는 것은 자기 외투 아래에서 떠남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온유하고도 기쁨으로 가득 찬 돌아옴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이전에 있었던 슬픔에 가득 찬 사건들을 감히 맛보아야 한다. 집을 떠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깊이 파헤칠 용기를 가질 때에만, 나는 돌아온다는 것의 참다운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아들의 부드럽고 노르스름한 속옷은 아버지의 붉은 외투와 풍부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사실 아들은 자기 안의 엄청난 비참함을 드러내는 누더기를 입고 있는 것이다. 연민어린 포옹의 맥락에서 보면, 우리의 부서짐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으나, 우리의 부서짐은 그 둘레에 있는 연민으로부터 나오는 아름다움 이외에 다른 아름다움이 아니다.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떠남-전통에 대한 공격적 행위

연민의 신비를 더 깊숙이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봐야 한다. 사실, 집을 향하여 돌아오기 훨씬 전에 아들은 떠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그리고서 아들은 상속받은 모든 것을 갖고 떠났다. 루카 사도는 이 모든 것을 너무나 단순하게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온전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즉, 일어난 일은 상처를 많이 입히고, 공격적이고 당대의 가장 존경받는 전통과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루카의 이 비유에 관해 날카로운 설명을 하면서 케네스 베일리는 아들의 떠남이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다고 설명한다. 베일리는 이렇게 쓴다:

"십오 년 동안 나는 모로코에서 인도까지 터키에서 수단에 이르는 온갖 다양한 삶의 관습을 지닌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왔다. 즉 아버지가 여전히 살아있는 데도 유산을 달라고 아들이 청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물었다. 대답은 늘상 단호하게 같았다... 대화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당신이 사는 마을에서 그런 요청을 한 사람이 있는가?
절대로!
어떤 사람이 그런 요청을 할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때릴 것이다, 당연하게!
왜 그런가?
그런 요청이란-아들이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베일리는 아들이 단지 자기 몫의 분리를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역할의 분배까지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소유물을 아들에게 넘겨주는 서명을 해도,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는 한 그 과정을 취소할 권리를 갖는다. 여기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아무런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분명하게 자기 몫을 요구한다. ‘아버지, 나는 당신이 죽는 것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자기 몫의 분리와 자기 역할의 분배까지 의미 한다.”

따라서 아들의 “떠남”은 처음에 얼핏 읽는 것보다 훨씬 더 공격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난 집을 무정하게 거부하는 것이고 자기가 속한 더 큰 공동체의 가장 소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유지되어온 전통을 깨뜨리는 행위이다. 루카가 “먼 나라로 떠났다”라고 쓸 때에, 그는 젊은 청년이 세상을 더 보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루카 사도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내려온 거룩한 유산인 살아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아들이 무자비하게 끊어버리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존중하지 않는 것을 넘어, 그것은 가족과 공동체의 보물 같은 가치관들을 배반하는 것이다. “먼 나라”는 집에서 거룩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을 무시해버리는 세계를 의미한다.

정적 속에서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이러한 설명은 나에게 의미심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맥락 속에서 비유를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 무엇보다도 – 내 안에 있는 작은 아들을 알아보도록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런 파괴적인 반란을 나의 여정에서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일처럼 보였다. 나의 유산이 지닌 가치관들을 거부하는 것은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해 볼 때에 결코 있을 법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모호한 방식으로 가까이 있는 집보다 먼 나라를 선호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아들이 재빨리 부상한다. 나는 여기에서 영적으로 “집 떠나기”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측면은 내가 사랑하는 네덜란드 바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신체에 관한 단순한 사실과 매우 구분된다.

복음에서 돌아온 아들의 비유는 그 어떤 다른 이야기보다 하느님 의 한계 없는 연민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사랑의 빛 아래 나 자신을 비유에 견주어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집을 떠나는 것이 나의 영적 체험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확인한다.

렘브란트의 아들을 환영하는 아버지 그림은 거의 외적인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1636년에 렘브란트가 그린 이 그림의 동판화는 움직임이 가득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오고 아들은 아버지의 발아래 자기를 던지고 있다. 그런데 30년 후에 그려진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의 그림은 아주 고요하다. 아버지가 아들을 만지는 모습은 영원한 축복의 행위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가슴에서 쉬고 영원한 평화를 느끼는 모습이다.

정적의 구도 안에서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순간은 끝없이 지속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움직임은 지나가 버리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바깥에서 보면 거의 동작이 없지만, 내적으로 보면 그보다 더한 움직임이 없다. 이야기는 지상의 아버지의 인간적 사랑을 다루고 있지 않다. 그림에서 의미하고 나타내는 바는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거룩한 사랑과 자비이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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