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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쩌면 악마인지 몰라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35]

얼마 전 고시원 화재로 돌아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편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시다 참 아프게 이 세상을 떠나셨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아파트 값이 어떻게 될 것인가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세상에서, 또 어딘가에선 어느 도시 어느 동의 아파트 몇 평을 얼마나 주고 사서 얼마나 더 벌었다는 이야기가 오가는 세상에서, 바로 이런 욕심의 세상에서, 이 세상의 이야기가 저 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세상이 모두 자기 욕심으로 살아갈 때, 그 욕심으로 서로 싸우며 살아갈 때,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이들은 한 없이 큰 아픔을 당연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혹은 지금 자기 눈앞에 일어나는 경쟁과 큰 상관이 없다면, 굳이 관심 둘 것 없이 그냥 자기 앞의 욕심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사진=한상봉

가톨릭 성당을 다니고 개신교회를 다니고 절에 다닌다고, 어떤 종교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종교도 그렇다. 더 큰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의 대단함을 보이려 경쟁하는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게 모두가 서로 자기 잘 났다고 경쟁하고 있는 동안, 그 뒤에 남겨진 이들의 아픔을 돌아보지 못했고, 그 뒤에 남겨진 부조리의 공간을 돌아보지 못했다.

어쩌면 모두가 욕심을 향하여 달리는 동안 세월호의 비극도 있었고, 지하철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극도 있었고, KTX 노동자의 오랜 투쟁과 비극적 죽음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뿐인가? 그 잔인한 경쟁 속에서 매해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존재를 비관하고 때론 자살하기도 한다. 누구 집 자녀는 어떤 성적으로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들어가 앞으로 잘 것이라는 찬양 속에 우리 사회 가운데 더 많은 다수를 이루는 그곳을 다니지 않은 그리고 그곳을 다닌 적 없는 이의 불편과 아픔은 지워지기도 한다.

경쟁의 앞자리에 선 자의 당당한 승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부조리와 아픔이 숨겨져야 하는가? 그런데 그렇게 앞자리에 선 이들이 어디 패배자들을 돌아보기라도 하는가?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잔인한 구호 속에 얼마나 사악한 사회적 암세포가 되어 살아가는 것을 우린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승리감에 취해 자기 욕심만 생각하는 그들을 보면, 과연 이 경쟁뿐인 세상, 이 세상은 과연 누구를 위한 세상인가 궁금하다.

더 비싼 아파트로 더 많은 돈을 벌고 그것을 위해 잔인한 재개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고, 고시원을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힘겨운 이들도 있다. 부자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서 시작하는 이들도 있고, 어린 나이에도 갑질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이 많은 어른에게 독설을 하며 자라는 이들도 있고, 공무원이 되기 위해 밥값마저 아껴가며 공부하는 이들이 있고 그 욕설 앞에서도 그 서러움 앞에서도 해고의 공포 속에서 눈물 흘리는 이들이 있다. 나에게 왜 그렇게 비참한 40대를 살아가는가 이야기하는 아직도 직장 없이 부자 아버지에게 매달 거금의 용돈을 받는 친구도 있고, 이런 나보다 더 힘들게 매달 매달 그냥 그 매달을 생각하며 삶을 지탱하는 친구도 있다.

이제 곧 예수가 오신 날이 다가온다. 성탄의 기쁨 속에서 그 환한 빛 가운데 보이지 않은 어둠 속 아픔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나 자신의 소유욕 자랑이 마음 아파하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 돌아보며 말해야 한다. 혹시나 자신의 쉬운 이야기에 자신에게 고용된 이가 마음 아프지 않을까 돌아보며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런 생각하는 삶이 성가시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돌아봄과 생각함의 삶이 참 신앙의 삶이라 생각한다. 나의 말과 나의 행복이 남에게 아픔이 되고 절망이 된다면, 나란 존재는 남에게 악마가 되어 있단 말이다. 나란 존재 자체가 사탄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악마를 멀리 초감각적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란 존재의 모습으로 지금 여기 있는지 모른다. 삶 속 퇴마사의 삶은 드라마 속 구마의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삶, 양심의 호소에 반응하는 삶, 돌아보는 삶으로 충분 할 것이다. 그것만으로 이 세상 악마는 어디에서 서지 못할 것이다.

신앙의 삶을 살아간다면서 사회적 악에 동참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타인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에게 올바른 신앙을 기대할 수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공익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이라면 선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의 옆에서 아파하는 이의 아픔에 손 내밀지 못하는 자, 사회적 부조리 속에서 아파하는 이들을 보고도 어쩔 수 없다 고개 돌리는 자,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조롱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자, 과연 이들에게 선한 사람,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해방신학자 보프의 말과 같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삶, 그 아픔 삶의 시선에서 그들의 편에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그저 그들의 아픔을 안다고 그런 이들이 어딘가 있다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잠시 스치는 미안함에 그쳐서는 안 된다.

성탄의 기쁨, 그 기쁨이 그저 즐거운 노래 소리와 화려한 치장에 가려지지 않기 위해, 정말 참다운 기쁨이 되기 위해, 지금도 아픈 이들의 힘겨움을 마주하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희망으로 이 땅에 오신 분, 아픈 자의 눈물에 따스한 손수건으로 이 땅에 오신 그분의 태어남을 정말 제대로 기억하고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세상에 부는 바람이 제법 차갑다. 사랑의 신앙을 실천하기 좋은 날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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