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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께 여쭤봤나요?" 누가 평신도를 결정장애자로 만들었는가?

[정용희- 평신도가 바라는 교회, 본당 사목위원이 바라는 교회]

대학 시절에 ‘그리스도교 신앙개론’이란 교양과목 수업을 들었다. 그 신부님에게 그리스도교를 소개받고, 이런 종교라면 나도 한번 따라 보리라 결심하고 세례를 받은 지 어느덧 40년이 되어간다. 길다면 긴 40년이라는 시간 동안 뜨거울 때도 냉랭할 때도 또 그저 그럴 때도 있었지만,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가톨릭 신자임을 부끄럽게 여긴 적도 없었다. 교회의 역사적 과오나 현재 불합리한 점들과 관련해서도 언젠가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나이가 50대에 들어서며 아이들이 제 갈 길을 떠나고 여유도 생겨 본당에서 사목위원을 맡게 되었다. 여러 사목분과의 일을 맡아 하고 본당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일주일에 2, 3일은 성당에서 보냈다. 그런데 성당에 머무는 시간이 늘수록 이게 아닌데,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아는 교회가 이런 교회였던가?’ 하는 의문과 걱정이 늘어난다.

평생 냉담 한 번 한 적 없는 아내조차 마찬가지 심정이란다. 우리 부부가 유별나서 그런가 싶어 오래된 신자나 속내를 나눌 만한 가까운 분들에게 조심스레 심정을 털어놓으니 그분들도 같은 이야기들을 한다. 교세는 늘어났다고 하지만 사제, 수도자, 평신도 할 것 없이 뭔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교회가 진화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교회는 퇴행하는 것일까?

 

사진=한상봉

퇴행하는 교회의 모습-평신도 희년 전대사 유감  

최근 교회가 자꾸 거꾸로 간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 풍경을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본다.

2017년 11월 7일 한국 주교회의는 “교황청이 주교회의의 전대사(全大赦) 청원을 받아들여 평신도 희년 기간에 모든 신자에게 전대사를 수여하기로 결정하고 공식적인 전대사 교령을 보내기로 알려왔다”라고 밝혔고, 이어서 11월 18일에는 아래와 같은 전대사의 조건을 하달했다.

●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며, 아래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를 이행하기.
● 교구장 주교가 지정하는 성지를 찾아가 ‘사도신경’이나 ‘시복 시성 기도문’ 바치기.
● 교황의 지향에 따라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한 번씩 바치기.
● 냉담 교우 회두, 소외된 이 돌보기, 환경과 생명 보호 활동에 참여하기.

각 본당의 강론들 또한 전대사에 대한 생색내기 일색이었다. 그중 한 부분을 소개한다.

"한국교회의 평신도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이번 전대사를 통해 여러분의 잠벌(暫罰)은 사라지고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는 받았지만 얼룩져 있는 여러분의 영혼은 이 전대사를 통해 흰옷에 진 얼룩이 지워지듯 깨끗하게 되는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교회의가 하달한 전대사의 조건들이 유치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전대사의 결과로 주어진다는 은총들이 그리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레오 10세의 전대사 시행에 대한 95개 조의 반박문을 붙였다. 2017년은 교회 분열의 계기가 된 이 사건이 일어난 지 딱 500년이 되는 해였다. 500년 전 교회가 재정문제로 전대사를 시행했다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자신의 부족한 영성 콘텐츠 문제로 시대착오적인 전대사를 시행했다고 생각한다.

전대사 문제가 빌미가 되어 교회가 분열된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시기에, 왜 한국천주교회는 굳이 교황청에 전대사를 청원했을까? 게다가 대사, 잠벌, 연옥 같은 중세적 교회 언어가 과연 오늘을 사는 평신도들에게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강한 의문이 든다. 평신도가 세상 안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희년의 능동적 실천을 독려하기보다, 개인구복에 치우치는 전대사의 은총만 강조되는 오늘의 교회 모습은 500년 전 루터가 문제제기했던 중세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접하게 된 것이다. 역사가 500년 전으로 퇴행하는 듯하다.

긴급조치 명령 같은 사제의 사목방침

본당의 평신도 사목협의회의 구성원들은 나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위원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인정받는 동시에, 본당 안에서도 신망이 두터운 이들이다. 따라서 본당에서 발생하는 대부분 사안이 이들의 검토와 협의를 거치면 매우 합리적이고도 현명한 결론이 나온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사심 없이 민주적 협의와 절차를 통해 도출한 결과가 나쁠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막상 결론은 어이없을 때가 비일비재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제의 사목방침(사실상 교도권)이라는 ‘긴급조치’ 명령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과거 정치사에서 독재자의 목적만이 반영되고 절차의 정당성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던 긴급조치 명령과 같은 메커니즘이 본당 사목회의에서는 상식처럼 작동한다. 반복되는 긴급조치로 유능한 신자들은 바보로 전락해간다. 양식 있는 신자들의 합리적이고도 복음의 빛을 잃지 않는 판단들이 사목방침이란 긴급조치로 훼손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본당 살림살이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한국교회의 사제 대부분은 이구동성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외친다. 이들은 공의회 문헌 중에서도 특히 <사목헌장>과 <평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적극적으로 인용한다. 그러나 막상 사제 본인에게 탈권위와 이견에 대한 수용이 요구되면, 평소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예찬론자들이 느닷없이 트리엔트공의회의 신봉자로 돌변한다. 성경 못지않게 은혜로운 이 위대한 문헌의 내용이 생명을 잃고 사문화되는 순간이다. 본인의 권위와 관계없는 사안에는 한없이 공의롭지만, 직접 관계되는 사안에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사제들의 모습에 우리는 아주 익숙해졌다.

섬김의 주객이 뒤바뀐 교회

교회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공동의 가치로 삼고 구현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이 모임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없다면, 다시 말해 이 모임이 복음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나는 네 복음서 어디에서도 섬김 받고자 하는 예수, 상명하달의 명령을 하는 예수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했다. 내 눈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제자들의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는 종의 모습을 한 예수만 보일 뿐이다.

언젠가 본당의 한 사무원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본당에서 누가 제일 높고 누가 제일 낮은지에 대한 시시한 대화였다.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그 사무원은 사제가 제일 높고 본당에서 월급 받는 자신이 제일 낮다고 말했다.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전체 교회의 지도자, 로마의 주교, 그리스도의 대리자, 보편 교회의 최고 대사제, 바티칸 시국의 원수 등 교황을 칭하는 많은 명칭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명칭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교회가 이처럼 퇴행한 데는 신자들의 ‘바보들의 합창’ 같은 모습도 한몫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퇴행을 부추기는 신자들

“신부님께 여쭤봤나요?”

본당에는 회의가 무척 많다. 새로운 단체와 새로운 회의도 자꾸만 늘어난다. 그러나 회의해봤자 사제 없는 회의는 하나마나다. 누군가의 참신한 건의도,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도, 즉시 실천할 수 있는 결론이 되는 일은 드물다. “신부님께 여쭤봤나요?”, “신부님께 여쭤보고 결정합시다”가 회의의 한결같은 결론이다. 누가 이들을 결정장애자로 만들었는가? 훌륭한 부모, 유능한 사회인이 성당에서만은 바보와 다름없다.

“주교님 납신다는데”

주교님의 사목방문 통보가 왔다. 성당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주교님 식사를 근처 식당에서 하기로 하자 참석자 명단에 들기 위한 물밑 로비가 치열하게 일어났다. 꼭 참석하려고 애쓰는 분들일수록 평소에는 본당 일에 관심이 적다.

주교님께서 본당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드시기 원하신다는 통보가 재차 날아들었다. 장군의 사열을 앞둔 졸병들처럼 주교님 동선에 따른 청소가 한창이다. 수녀원에서는 재정분과와는 의논도 없이 사무실에 비용을 청구해 주교님용 식기 일체를 사놓고 본다. 신자의 집에서 하루만 빌려 써도 될 텐데 말이다. 주교님에 앞서 ‘지름신’이 먼저 오셨다 갔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주교님에 대한 찬양과 아부성 발언만이 난무한다. 본당의 현안과 교회의 미래에 대한 건의나 논의는 끼어들 틈도 없다. 그럴 분위기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모두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한 톤씩 높아져 있다. 식사 전후의 기도 소리도 한결 우렁차다.

교본에 집착하는 레지오 마리애

아내는 대표적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에서 30년 넘게 활동했다. 회계와 서기 직책만 10년 넘게 맡았다. 아내의 레지오 단원들은 좋은 분들이 많다. 그러나 그중에는 미사는 나오지 않고 회합에만 나오는 분도 있다. 그분에게 레지오는 건전한 계모임에 불과하다. 많은 레지오 단원에게는 레지오의 교본이나 까떼나(Catena Legionis, 레지오 마리애의 고리기도)가 성경이나 교리책보다 더 소중해 보이기조차 하다. 교리나 성경 구절은 잘 몰라도 교본과 까떼나는 줄줄 꿴다. 21세기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나라 중 하나다. 이런 우리나라에서 많은 분이 20세기 초 아일랜드에서 만든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집착하다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괴로워하며 지켜내야 하는 성체조배회

본당에 지속적인 성체조배회가 조직되었다. 성전에서의 기도보다 조배실에서의 기도가 기도발이 더 나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다들 충만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새벽 시간에 조를 짠 형제분들이 괴로워한다. 3인 1조인데 잘 빼먹는 두 사람 때문에 혼자 성체를 지키느라 열심한 분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간절한 목소리로 내게 SOS를 청한다. 제발 같이 좀 하자고.

조배실은 거룩하고도 성스러운 지성소가 되었다. 그 주위부터 벌써 긴장감이 감도는데 조배실 안의 분위기야 오죽하랴. 복잡함과 소음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조용한 기도의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의미인 성체조배실의 운영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체에 대한 지나친 공경에 따른 미신적 역작용도 생각해봐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나와 일상을 함께하시던 주님께서 조배실에 갇혀서 행여 답답해하지나 않으실는지……. ‘성체사수대(死守隊)’, 이는 성체조배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실천은 사라지고 기복적인 기도와 믿음만 난무한 신앙

본당의 날 행사가 다가왔다. 성전 건축 기금을 위한 바자회도 다가왔다. “기도합시다, 그날의 날씨를 위해서!, 믿음으로 저 산도 옮기는데 그깟 비 정도야…….” 기도와 믿음은 실질적 은총을 보장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한다. 나는 많은 교우가 본당 활동이나 기도에 앞서 가정이나 직장에서 자신의 할 일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에도 기복적 기도와 믿음 만능주의가 일상의 언어로 사용된다. 전통적으로 실천을 중요시해 온 우리 가톨릭교회의 모습과는 다른 듯하다. 인근의 한 개신교회는 기도발, 헌금발이 잘 받기로 유명하다. 기도를 하든 헌금을 하든 투자 대비 수익이 대박이었다는 기적의 소문이 무성한 곳이다. 이런 기적을 원하시는 분들은 그 개신교회로 가시는 편이 나으실 텐데…….

내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교회

지난 여름, 워마드의 한 젊은이가 성체에 낙서하고 태운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 가톨릭 신자가 젊은이들의 당돌함을 한결같이 비난하고 주교회의는 바티칸에 보내는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바빴다. 그때 나는 직접 그 사이트에 들어가 게시글을 보았다.

문제가 된 게시글에는 여러 댓글이 달렸는데, 그중 ‘알래스카계란장수’라는 닉네임의 댓글이 가장 인상 깊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한국천주교회가 어떻게 보이는지 여실히 읽어낼 수 있는 글이라 저장해두었다. 거친 표현이 섞여 있지만, 지적하는 내용에 주목하기를 바라며 그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번 낙태죄 폐지에 천주교가 개꼰대짓 하는 걸 보면서 천주교 신자로 보낸 세월이 20년이 넘은 엄마와 한참 통화했다. 종교 쪽으로는 문턱도 밟을 생각이 없는 내게 레지오니 꾸리아니 하는 말들이 이제는 익숙할 정도로 엄마는 오랜 세월 성당일을 해왔고 내 눈에는 단순히 무급노동력 제공으로만 보이는 일들을 성모님의 일이라며 오랜 세월 해오셨다. 같이 일하시는 분들은 거의 그 또래의 중년 여성들이며 이들이 하는 일은 성당 청소, 밥하기, 설거지하기, 각종 행사 준비, 가정 방문, 병원 방문, 주임·보좌신부 챙겨주기…… 등등이 있다.

한마디로 성당 구석구석 이분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며 이들의 무급노동력 없이 성당은 돌아가질 않아 보인다. 관절염 걸린 무릎으로 성당 바닥을 청소하는 여성 신자들 앞에 주임신부는, 딱 소작인 부리는 마을 영주와 같은 자세이다. 그러나 정작 신부와의 술자리 밥자리의 어울림은 거의 잘나가는 신자들의 몫이다.

한남들이 어머니와 아내의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수십 년 성당의 온갖 궂은일을 다해 와도 그분들은 언제나 말석의 투명인간들이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이며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시지만 여성 사제가 나올 일은 없다 하시는 그분께, 여성은 인류의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한국의 제사문화와 완벽히 일치한다. 제사문화의 핵심인 ‘대를 잇는 일은 오직 남자만’이 할 수 있도록 가부장의 신이 정해주신 일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집 귀신들 먹일 음식 하느라 부엌에서 종일토록 기름 냄새 뒤집어쓰고 구정물에 손 담가야 하는 유교의 제사, 명절 문화의 그 병신스러움과 엄마의 성당 생활은 어찌 그리 똑같은지…….

며칠 전 사제서품을 갓 받은 새 신부의 잔치준비를 하러 성당에 가는 엄마에게 한소리 하였다. '엄마랑 아주머니들이 성당 전속 시녀야? 아들뻘의 어린애가, 정작에 여성은 하지도 못하게 막아놓은 성직자라는 직업선택 좀 한 것 가지고 신부님, 신부님, 조아리는 게 자존심도 안 상해? 허구한 날 일어나는 성범죄에는 입 처닫고 있다가 그깟 밀가루 빵 쪼가리 태울 때랑 낙태녀 처벌하고자 할 때만 지랄 발작하는 게 뭔 종교냐 사이비지…….'"

젊은이들은 가톨릭교회 안에 시대착오적인 권위주의와 다양한 종류의 차별이 횡행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한마디로 가톨릭교회는 ‘꼰대적’이라는 것이다. 만약 위의 글을 쓴 젊은이가 신자라면, 나는 이 젊은이를 교회쇄신 위원으로 위촉하고 싶다.

예수의 하느님과 교회의 하느님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의 사신(使信)은 평화와 자유, 정의와 생명에 대한 인류의 갈망과 추구라는 지평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발터 카스퍼의 <예수 그리스도>,분도출판사, 1977, 119쪽 참조)

나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열망과 인류가 역사 속에서 이룩하려는 궁극적 열망을 분리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역사를 함께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 안에서의 성화(聖化)보다 세상 전체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는 끊임없이 우리를 과거의 교의 속에 가두어 두려 하고, 신자들에게 사회적 삶보다 교회 안에서의 삶에만 관심을 두기를 강요하는 것 같다.

우리의 삶 속에서 복음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할지 노력하는 교회가 아니라, 교계제도의 팽창과 수호에만 집착해 각종 단체나 온갖 이벤트성 행사로 교회 안에만 얽어매는 모습은 우리 신앙의 근본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복음서에서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잔치를 베풀어주시던 분이었고, 나의 이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와 이웃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내 삶과 신앙의 원동력이다.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아버지와 교회가 가르치는 아버지가 같은 하느님이길 바란다.

함께 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구원이다. 그 구원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김을 실천하고, ‘신랑이 함께 있는 잔치’에서 사람들이 기쁨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서공석, <하느님과 인간>,서강대학교 출판부, 2014, 167쪽 참조)

*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8년 11-12월호(제18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정용희
우리신학연구소 이사. 대학 시절 근로 청소년을 위한 ‘이냐시오 야학’과 약현성당 주일학교 교리교사를 4년간 했다. 졸업 후 직장생활을 거쳐 낙향 후 중소기업을 창업, 26년째 경영하고 있다. 6년 전부터는 부산의 한 본당에서 사목위원을 맡아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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