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영원에서 순간으로, 사랑의 집에서 두려움의 집으로 가라는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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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영원에서 순간으로, 사랑의 집에서 두려움의 집으로 가라는 예언
  • 헨리 나웬
  • 승인 2018.11.2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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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3]

새벽공동체에 들어온 뒤에 일어난 많은 일은 일기나 공책에 적혀있지만, 보통 그런 것처럼, 그 글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기가 적절치 않다. 단어들은 거의 다듬어지지 않았고, 산만하고, 너무 “살벌하고” 그리고 너무 노골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소용돌이의 시간들을 돌아보고, 이전보다 더 객관적으로 이 모든 갈등과 투쟁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갔는가에 대하여 표현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 하느님의 안전한 품안에 완전히 안길 수 있을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많은 측면에서 나는 아직도 중심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 나는 여전히 돌아온 아들 같다. 즉 여행 다니고, 강연을 준비하며, 마침내 아버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어떨까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참으로 나는 집으로 가고 있다. 나는 멀리 있는 나라로 떠났고 가까이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이야기를 지금 나눌 준비가 되었다. 희망, 빛, 그리고 그것들 안에서 위안을 발견한다. 과거 수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이 이야기에 포함될 것이다. 혼동이나 실망의 표현이 아니라, 빛을 향해가는 나의 여정에서 맞닥뜨린 순간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런 여정을 계속하는 동안 렘브란트의 그림은 나에게 매우 가까이 있었다. 나는 그림을 수없이 움직였다. 내 사무실에서 경당으로, 경당에서 새벽 공동체의 기도집인 여명의 거실로, 그리고 여명의 거실로부터 다시 경당으로 옮겼다. 그림에 대하여 새벽 공동체 안팎에서 수차례 말하기도 했다. 장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협력자들, 봉사자와 사제들, 그리고 삶의 다양한 길을 걷고 있는 남녀들에게.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돌아온 탕자, 모든 삶이 그곳에 있다 

<돌아온 아들>에 대해 더 말할수록, 나는 그 그림을 나의 개인적인 그림으로 보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을 지니고 있는 그림일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 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모든 것이 그 그림에 있다. 나의 모든 삶이 그림에 있다. 내 친구들의 모든 삶이 그곳에 있다. 그림은 내가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신비로운 창문이 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실존의 다른 쪽으로 넘어가게 해주고 그곳으로부터 나의 일상 삶을 이루고 있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사건들로 다시 돌아가도록 하는 거대한 문과 같다.

오랫동안 나는 인간경험의 다양함을, 인간의 삶에서 보이는 외로움과 사랑, 슬픔과 기쁨, 원망과 감사, 전쟁과 평화 등을 주의 깊게 바라봄으로써 하느님을 일별하기 위하여 노력해왔다. 인간영혼의 굴곡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을 지닌 하느님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굶주림과 갈증을 영혼 속에서 분별하기 위하여 애써왔다. 또한 지나가는 것 너머의 지속적인 것, 현세적인 것 너머의 영원한 것, 마비시키는 모든 두려움 너머의 완전한 사랑, 그리고 인간의 번민과 고뇌가 가져오는 우울함 너머의 거룩한 위로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끊임없이 우리 실존의 도덕적 측면을 넘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고, 더 아름다운 현존을 가리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 현존이 기꺼이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지금 이 곳에서 보여지고 들려지고 만져질 수 있는 현존이라고 말하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곳 새벽 공동체에 있으면서, 나는 전에 결코 있어 보지 않은 내적자리로 이끌렸다. 그 자리는 내 안에 있고 하느님이 머물기로 선택한 자리였다. 나의 이름을 부르고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사랑이 가득 찬 아버지의 품 안에 안전하게 안기는 자리였다. 그곳은 내가 이 세상 것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자리이다.

이 자리는 항상 그곳에 있어왔다. 나는 항상 그 자리를 은총의 원천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참으로 그곳에 살 수 없었다. 예수님은 말씀한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 말씀은 항상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왔다. 나는 하느님의 집이다!

그러나 이 말씀들의 진실을 경험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 하느님은 나의 가장 깊은 존재 속에 머무른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물겠다.” 초대는 명료하고 분명하다. 하느님이 당신의 집을 만드는 곳에 나의 집을 만드는 것, 이것이 위대한 영적 도전이다. 그런데 불가능한 과제 같이 보인다.

하느님의 집에 내 집을 짓고 

나의 생각, 느낌, 감정, 그리고 열정을 갖고 나는 끊임없이 하느님이 그분의 집으로 선택한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선택한다. 하느님이 머무는 곳에 머물고 그곳을 집으로 여겨 돌아가는 것, 진실과 사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은 참으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항상 나의 모든 부분을 원하는 질투하는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같은 사랑을 언제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느님께서 몸소 그런 길을 보여 주었다. 새벽 공동체에서 나의 바쁜 삶에 침입했던 정서적 신체적 위기들이 폭력적인 힘을 갖고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이 발견될 수 있는 곳에서 하느님을 찾으라고 – 내 안의 지성소에서 - 흔들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다고 말할 수 는 없다. 아마도 이 지상의 삶에서는 결코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죽음의 경계선 너머보다 훨씬 멀기 때문이다. 그 여정은 길고도 매우 요구적인 여정이지만, 또한 놀라움들이 가득하고, 우리에게 최종 목표의 맛을 자주 제공해주기도 한다.

처음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았을 때에, 나는 지금처럼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집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포옹에 대해 나의 강렬한 반응은 그림 속의 젊은이처럼 나도 그렇게 안전한 품에 안길 수 있는 그 내적 자리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때 나는 내적 자리에 몇 걸음 더 가까이 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미리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준비하고 있는 것을 미리 알지 못한 것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그러나 또한 나는 모든 내적 고통을 겪으면서 내 안에 열린 새로운 자리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나는 이제 새로운 초대를 받는다. 그것은 내적 자리로부터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불안한 삶으로 다시 돌아가 말하고 쓰라는 소명이다. 나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가슴에 나의 귀를 대고 어떤 간섭도 없이 그분의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때에야, 그리고 오로지 그때에만 나는 내가 듣는 것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매우 부드럽게 말할 수 있다.

영원으로부터 시간 속으로, 영원한 즐거움으로부터 이 세계의 짧은 실존의 지나가는 실재들 속으로, 사랑의 집으로부터 두려움의 집으로, 하느님의 거처로부터 인간 존재의 거처 속으로 돌아가 말해야 한다. 나는 이 소명의 막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나에게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예언자적” 비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느님의 눈을 통하여 사람들과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존재에게 참으로 실제로 가능한 일일까?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이것이 나에게 참다운 선택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적인 질문이 아니다. 소명에 관한 질문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머무시기로 선택한 나의 내적인 지성소로 들어가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 자리로 가는 유일한 길은 기도, 끊임없는 기도뿐이다. 많은 투쟁과 많은 고통이 그 길을 깨끗하게 할 수 있으나, 오직 끊임없는 기도만이 나를 내적인 자리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리라고 확신한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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