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복음, 하느님의 혁명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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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복음, 하느님의 혁명 선언
  • 죠지 쏘아레스 프랍후 신부
  • 승인 2018.11.1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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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사회정의-3

예수의 논쟁: 기존 체제에 대한 반대

예수는 분명히 정치적인 개입을 거부한다.(마태 4,1-11 : 요한 6,15: 마르 12,13-17)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처럼 사회경제적인 구조의 운용을 알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학자들의 강박적인 율법주의(안식일 논쟁, 마르 2,23-3,6)에 대한 반대, 연민의 여지가 전혀 없는 궤변에 대한 성난 단죄(유다의 형식적인 전통에 대한 거부, 마르 7,9-13), 격리적이고 차별적인 규정에 대한 끈질긴 위반(마르 2,15-17,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함), 그리고 사제 귀족계층의 착취에 대한 폭력적인 항의(성전정화 마르 11,15-19) 등은 모두 기존체제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종교적인 권위를 행사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권력과 깊게 밀착되어 있었다.

그 당시 예수는 적어도 암암리에 개인을 회개시켰을 뿐 아니라 체제에까지 도전했던 것이다.

예수의 기적: 권력구조의 전복

예수는 그의 기적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시도를 하였다. 그는 단순히 그에게 다가오는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구제하는 연민의 정으로만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병의 원인인 악마적 권력구조를 파괴하는 거대한 해방전쟁 속에서 전초전으로 기적을 행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앓는 몇 사람을 낫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병 자체를 없애기 위하여 온 것이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마르 3,27).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치유와 구마활동을 힘센 사람을 묶어 놓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탄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와 그 통치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당시 묵시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사탄이 움직이는 악마적 권력구조가 세상을 억압하고 있었으나 예수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의 치유와 구마를 통하여 그 억압은 끝내게 될 것이었다.

세속적이고 과학적인 오늘 세계에 사는 우리들은 이러한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묵시적인 세계관에서는 수많은 악령과 천사의 영들이 우주에 영향을 미치고 역사적 사건을 진행시켜 나간다.

따라서 예수가 선포했고 실천했던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구원뿐 아니라 모든 악마적이고 비인간적인 권력구조에 대한 도전도 분명히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적은 사회사업 보다는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사회정의에 향한 예수의 투신이 가장 명확하게 표현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그의 사명에 대한 이해였다. 이것은 나자렛 회당에서 안식일에 하신 설교(루카 4,16-21)와 산상수훈에서(루카 6,20-27) 가장 강력하고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Darstellung der Bergpredigt in der Matthäus-Kirche von Kopenhagen

예수의 선언: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루카 복음에서 예수는 안식일에 자기가 자라난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 들어가 설교함으로써 사명을 시작한다. 이 설교는 예수가 그의 사명을 선포하는 일종의 선언문이라 하겠다.

예수는 그 당시 구약의 공식 희랍어 번역판인 70인역에서 이사야 예언서 61장 1절~2절까지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두 가지 의미심장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의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를 빼고 대신 이사야 예언서 58장 6절의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로 바꾸고 있다.

<이사야 58,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19>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는 이처럼 자신의 사명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가 선포한 기쁜 소식은 그들에게 해방의 소식이었다. 가난한 이들은 가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감옥에 갇힌 이들도 풀려날 것이며 눈먼 사람들은 보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명은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는 오늘 이 선언문을 읽음으로써 사명을 시작하였다. 구약의 주님의 은총의 해인 희년 규정으로 미리 표현된 새로운 사회질서, 모든 빚이 사해지고 노예가 해방되며 저당 잡혔던 토지가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지는(레위 25,8-17. 25-28) 새로운 질서를 선포한 것이다.

예수의 사명은 따라서 강력한 사회성을 띄고 있으며 추상화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사명의 내용이 유배로부터 금방 돌아온 유다의 가난한 이들에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사 61,1-2)과 희년의 사회에 관한 법을 이용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그러한 예언을 인용한 방식에서 우리는 그의 사명의 강한 사회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즉 구약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본 것처럼 예수는 자칫 추상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해석으로 기울어질 구절 즉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를 빼고 이사야 58장 6절의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구절을 인용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이사야 61장 1~2절을 해석하기 위하여 58장 6절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58장 6절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한 것이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졌다면, 선포되는 기쁜 소식은 억압받는 이들이 자유롭게 되리라는 것이다(이사 58,6). 예수는 이처럼 억압받는 모든 이들이 해방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이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도래는 가난한 이들에게 다시 말하면 억압받는 이들에게 진정으로 기쁜 소식인 것이다.

예수의 산상수훈: 하느님의 혁명

예수 사명의 사회적인 차원은 특히 루카 복음의 산상수훈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루카의 산상수훈은 마태오의 그것과 분명히 다르다. 루카는 먼저 네 가지 경우의 행복한 사람들과 이어 네 경우의 불행한 사람을 설명하나(루카 6,20-26), 마태오의 경우는 9가지 참된 행복을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을 따름이다(마태 5,3-12).

이 가운데 첫번 네 경우(마태 5,3-6)는 루카의 첫번 세 경우와(루카 6,20-21) 일치하며, 9번째(마태 5,11-12)는 루카의 네 번째 그리고 마지막 구절(루카 6,22-23)에 해당한다. 마태오의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 구절까지는 루카에 대응구절이 없다. 그러므로 루카의 네 가지 산상수훈은 마태오의 첫번 네 가지와 마지막 구절과 대응하는 것이다.

<루카 6,20-23 >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마태 5,3-1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인 루카의 네 구절, 마태오의 아홉 구절들은 분명히 형식과 내용에 있어 다른 구절들과 매우 다르다. 표현방식은 반복적이고 리듬이 없으며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매우 뚜렷하게 오순절 이후 초기 공동체들이 생길 즈음의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루카의 첫번 세 가지 산상수훈은(그에 해당하는 구절과 함께) 상쾌하고 율동적인 표현방식과 강력한 예언적 내용(이것들은 모두 예수의 표현의 특징이다)을 담고 있는데 이를 모두 예수에게 돌려야 한다. 마태오의 친숙한 여덟 구절보다 이 세 구절에서 훨씬 더 우리는 예수가 말하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다.

마태오의 산상수훈은 의심할 바 없이 정신적인 문제(독선과 자기만족 등)가 사회문제보다 더 심각했던 공동체를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마태오는, ∙예수의 세 가지 본래 산상수훈을 체계적으로 추상화시켰다.

예를 들면 ‘가난’은 “마음으로 가난한”으로, ‘지금 굶주린’ 사람들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지금 우는’ 사람들은 ‘슬퍼하는 사람’으로 표현하였다.

네 번째 구절은 첫 구절과 대응하여 덧붙였는데 이 구절은 “온유한 사람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는 시편 37장 11절에서 직접 따온 것이다.

예수는 루카의 산상수훈 표현방식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루카의 이 세 가지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은 실제로 세 가지 다른 행복과 불행에 관한 구절이 아니라 사실은 한 가지 사실에 대한 다양한 표현인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세 가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고통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라는 한 부류에 대한 세 가지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자’와 ‘배부른 자’와 ‘웃는 자들’이 착취하는 부자들에 대한 다양한 표현인 것처럼.

루카의 산상수훈은 이처럼 한 가지 행복과 불행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며 여기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들(가난이 아니라!)을 축복하고 부자들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산상수훈은 지상에서 억압을 참아 견디면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와 같은 해석은 그리스도교를 인간의 아편으로 만드는 것이며, 물질적으로 가난하고(굶주리고 절망 때문에 우는 이들) 또한 가난 때문에 신체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말하고 있는 산상수훈의 구체적인 가르침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또한 예수가 선포한 지상적인 특징이 강한 하느님나라의 의미에 충실하지도 못한 것이니, 예수의 하느님나라는 항상 인간 역사 안으로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산상수훈은 하느님의 혁명에 대한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하느님의 혁명은 모든 착취가 끝날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가난하거나 부유하지 않는 그러한 새로운 사회질서의 혁명이다.

예수에 의하여 드러난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사랑은 마음의 변화(욕심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동료애와 보편적 사랑을 향한 자유)와 구조의 변화(착취적인 사회, 경제, 정치제도의 제거)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에서 미리 예견된 형제적 사랑과 비억압적인 사회질서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 그 초기공동체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2).

그러한 사회질서는 모든 그리스도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최종목표이며 근원적인 영감이 된다. 예수 안에 나타난 하느님 사랑으로 해방되어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랑을 실제로 구현하며 그 사랑의 흐름을 막는 장애물들을 없앤다.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하나의 인간가족, 하느님이 아버지로 체험되며 모두가 형제자매가 되는 그러한 가족을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변화시켜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다.

예수는 그러므로 개인적인 회개만을 의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변화를 위해서도 투신하였다. 예수에 의하여 시작된 하느님나라를 향한 사랑의 운동으로 그가 꿈꾸었던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변화, 사회의 변화 모두가 필요한 것이다. 그 새로운 공동체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하늘에 계신 한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자유와 동료애와 정의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착취와 소외가 끝난 공동체이다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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