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게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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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게 더 어렵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8.11.1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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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2]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방문한 후 수주일이 지나, 나는 토론토의 라르슈 새벽 공동체에서 살고 거주 사제로 일하기 위하여 그곳에 도착했다. 비록 일 년 동안이나 나의 소명을 찾고 하느님께서 정신장애 사람들과의 삶에 나를 초대하시는가를 분별하려고 노력했지만, 난 아직도 매우 염려스러웠고 잘 살아낼 수 있을 까 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나는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의 삶은 점점 더 대학교 학생들과 그들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강의, 저술하는 법,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거의 말을 할 수 없거나, 하더라도 논쟁이나 매우 합리적인 의견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의사소통해야 하는지 거의 몰랐다. 머리보다 가슴으로 더 듣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보다 사는 것에 훨씬 더 민감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한 마음을 갖고 1986년 8월 새벽 공동체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0여년을 학교에서 보낸 후, 하느님께서 가난한 영을 지닌 사람들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때가 되었고, 비록 내가 그들에게 줄 것은 거의 없으나 그들이 나에게 많은 것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나는 그저 관찰자/방관자에 머물러 있었다

공동체에 도착하고 나서 내가 먼저 했던 일 중의 하나는 돌아온 아들 포스터를 붙여 놓을 좋은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내가 일할 작업실이 바로 그 이상적인 자리였다. 앉아서 읽고, 쓰고 혹은 손님과 말할 때마다, 나는 나의 영적 여정에 매우 친밀한 부분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아들의 그 신비스러운 포옹을 볼 수 있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방문한 이후로, 나는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환영했던 밝은 자리 주변에 서 있었던 두 여성과 두 남성들의 모습을 더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 방관자들, 혹은 관찰자들은 온갖 해석을 일으킨다.

나 자신의 여정을 성찰해보면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스스로가 관찰자 역할을 해왔는지 점점 더 깊이 깨닫는다. 수 년 동안, 나는 학생들에게 영적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가르쳐왔고, 그들이 영적 삶을 사는 것의 중요성을 깨우치도록 도와왔다. 그러나 나 자신은 실제로, 감히 중심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나를 내어 맡겼던가.

의견을 표현하고, 논쟁을 일으키고 입장을 방어하며 비전을 명료화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은 오랫동안 나에게 그리고 아직도 어떤 지배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보통, 정의할 수 없는 상황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모험을 무릅쓰기보다 그런 상황을 지배하는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나는 느낀다.

물론, 많은 시간의 기도, 수많은 시간의 피정, 그리고 영적 지도자와 끝없이 대화를 나누어 왔으나, 나는 결코 방관자의 역할을 온전히 포기한 적이 없다. 비록 내 마음 속에는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바깥을 내다보고 싶은 일생의 갈망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서 안을 들여다보는 입장과 지위를 계속해서 선택해왔다.

때때로 이러한 안을 들여다보기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질투심으로, 어떤 때는 불안감으로, 그리고 가끔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비판적 방관자라는 어떻든 안전한 지위를 포기하는 것은 전적으로 알 수 없는 영역으로 거창한 도약을 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나의 영적 여정을 다스리고 싶은 생각이 강했다. 적어도 영적 여정의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기를 바랐다.

돌아오는 아들의 취약함을 선택하고 관찰자의 안전을 포기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았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수세기 동안의 수많은 설명들을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사람들이 과거에 선택했던 많은 영적 여정들을 보여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거룩한 포옹을 둘러싸고 있는 네 사람 중의 한 사람의 입장을 취하는 것과 매우 흡사했다. 아버지 뒤에 다른 간격으로 떨어져 서 있는 두 여인들, 앉아있는 남자는 허공을 응시하면서 특정한 누구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키 큰 남자는 꼿꼿하게 서서 그의 앞자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는' 모습을 나타낸다. 무관심, 호기심, 공상, 그리고 주의 깊은 관찰이 있다: 응시하고 뚫어져라 보고, 감시하고 바라본다. 뒷배경에서 있는 모습, 둥근 기둥에 기대어 있는 모습,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양 손을 움켜쥐고 서 있는 모습들이다. 이러한 내적 외적 자세들은 모두 나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어떤 태도들은 다른 태도들보다 더 편안하지만, 모든 자세들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모습을 나타낸다.

 

사진출처=pixabay.com

빛의 자리, 진리의 자리, 사랑의 자리

대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서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으로 움직이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아버지가 무릎을 꿇은 아들을 포옹하는 자리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일이었다. 그 자리는 빛의 자리, 진리의 자리, 사랑의 자리이다. 내가 너무나 있고 싶어하는 자리이지만, 그곳에 있기를 너무나 두려워하는 자리이다. 내가 갈망하는 모든 것을, 내가 희망해 온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받게 될 자리이지만, 내가 가장 붙잡고 싶은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자리는 자주 참으로 사랑, 용서, 치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들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과 직면하는 자리이다. 그 자리는 쟁취하고, 자격을 갖추고, 보상받는 것을 넘어서는 자리이다. 그곳은 승복과 완전한 신뢰의 자리이다.

새벽에 오게 된지 얼마 안 되어, 다운증을 지닌 아름다운 젊은 여성 린다가 내 목을 손으로 감고 말했다: “환영합니다”라고. 린다는 그런 인사를 새로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하고, 할 때마다 유보 없는 확신과 사랑으로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포옹을 받을 것인가? 린다는 전에 나를 만난 적이 없다. 린다는 내가 새벽에 오기 전에 살았던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린다는 나의 어두운 측면과 마주칠 기회도 없었고, 나의 밝은 구석을 발견할 계기도 없었다. 린다는 내가 쓴 책을 읽어본 적도, 내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없었다. 나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도 단순히 미소를 짓고, 린다를 귀엽다고 부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냥 계속 걸을 것인가? 린다는 단상의 어느 한 구석에 서서 몸짓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인가? “자 오세요, 그렇게 수줍어하지 마세요, 당신의 아버지도 당신을 꼭 붙들고 싶어합니다!” 마치 린다의 환영인사, 빌의 악수, 그레고리의 웃음, 아담의 침묵 아니면 레이몬드의 말들이 터질 때마다 나는 이런 자세들을 “설명하는 것”과 더 높이 뛰어오르고 더 가까이 다가가라는 초대로서 이런 자세들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새벽공동체에서 보낸 수 년 동안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내적인 투쟁이 쏟아져 나왔고, 정신적, 정서적, 영적 고통이 있었다.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도달했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버드에서 라르슈로 움직인 것은 내가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판관에서 참회하는 죄인으로, 사랑을 가르치는 교사로부터 사랑받는 자로 작은 한 걸음을 떼었다는 걸 보여주었다.

나는 참으로 이 여정이 얼마나 힘들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나의 저항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눈물이 그냥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정신을 차리는 일”이 얼마나 고뇌에 찬 일인지 깨닫지 못했다. 나는 렘브란트의 그림이 보여주는 그 위대한 사건에 참으로 한 부분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지 못했다.

중심을 향하는 작은 발걸음은 매번 불가능한 요구 같았다. 지배하고 싶은 욕구를 한 번 더 포기하고, 삶을 예측하려는 갈망을 다시 한 번 더 포기하기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모르는 두려움에 한 번 더 죽고, 한계가 없는 사랑에 한 번 더 승복하라고 나에게 다가오는 그 요구는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건이나 전제 요구없이 나 자신이 사랑받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위대한 계명을 결코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에 대해 가르치는 것에서 떠나 나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여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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