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계에 의한 수난자, 오늘의 수산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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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에 의한 수난자, 오늘의 수산나를 위하여
  • 정혜진
  • 승인 2018.11.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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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본 세상-정혜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했던 방송사의 저녁 뉴스에서 앵커는 이 판결에 대해 논평하면서 유명한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6)를 언급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스승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고발했지만 사회의 냉정한 시선과 가혹한 처우를 견뎌야 했던 성폭력 피해자였고, 억눌린 목소리를 대신하는 붓질을 통해서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 앵커는 그녀의 삶을 통해 유감천만한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증언한 여성들의 용기가 꺾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젠틸레스키의 그림 가운데〈수산나와 장로들〉은 잘 알려져 있다. 수산나는 성서의 인물이지만, 대부분 개신교 신자에게는 낯설 것이다. 개신교 성서와 달리 가톨릭 성서의 다니엘서는 14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3-14장은 구약 외경에 속하는 본문이다. 그 가운데 64절로 이루어진 13장은 흔히 ‘수산나 이야기’로 불린다.

수산나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요아킴이라는 남자의 아내였다. 부자인 데다 명망가였던 그의 집에는 드나드는 손님들이 많았는데, 개중에는 재판관으로 임명된 두 장로도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웠던 안주인 수산나에게 내심 음욕을 품던 이 둘은 어느 날 서로의 속내를 알게 되고 함께 그녀를 겁탈할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손님이 다 떠나간 후 요아킴의 정원에 숨어 있다가, 수산나가 대문을 닫아걸고 목욕하는 시간에 그녀에게 접근한다.

수산나에 대한 음욕을 채우기 위해 두 장로는 물리적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재판관이었던 그들이 내뱉는 몇 마디 말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그녀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겠다며 위협했다. 수산나에게 이 위협은 그들이 가진 권력의 현시였다.

수산나는 절망적으로 외친다. “나는 꼼짝 못할 곤경에 빠졌소. 그렇게 하면 그것은 나에게 죽음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오.”(22절) 소란 중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뜻을 이루지 못한 장로들은 협박한 대로 수산나에 대한 거짓 증언을 한다. 그녀가 꼼짝없이 사형을 당하기 직전 다니엘이 등장한다. 다니엘은 두 증인을 떼어놓고 심문하여 엇갈리는 증언을 하게 만듦으로써 그들의 거짓을 드러내고 수산나를 곤경에서 구해낸다.

수산나 이야기는 이처럼 미수에 그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다.

 

Susanna and the Elders (by Artemisia Gentileschi)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젠틸레스키가 자신을 투사해 특히 뛰어나게 그려낼 수 있었던 인물이 수산나였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오래전 수산나는 하나님의 영에 감화받은 한 지혜로운 인물 덕분에 억울한 판결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젠틸레스키, 그리고 ‘오늘의 수산나’ 김지은은 이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이 땅에서 법정으로 간 최초의 미투 사건에 이런 판결이 내려지다니 실망을 금할 길 없다.

사실 ‘비동의 간음죄’ 조항이 없는 우리 법체계의 후진성과 입법 개혁의 필요성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그럼에도 안 전 지사 사건은 현행 법체계 안에서도 충분히 처벌이 가능하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형법 303조 ‘위력에 의한 간음’ 조항에 기대어 위법사실을 인정받을 가능성은 검찰의 수사와 공소제기를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렇지만 재판부는 우리 사법체계 안에서 시대적 변화에 응답하면서 법을 해석할 수 있는 그들 고유의 권한과 책임을 방기하고 입법부에 핑계를 돌리면서 과거의 판례들보다 못한 후진적인 해석으로 퇴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이번 판결에서는 성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구체적 맥락으로서 지사와 비서라는 수직적, 위계적 관계에 대한 고려가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러고도 재판부는 ‘No means No’를 운운하며 시대적 흐름을 알고 있다는 코스프레로 사회적 요구를 기만했다.

우리가 사법부에 기대하는 것은 당사자들 외에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사건의 진실을 꿰뚫어볼 줄 아는 다니엘 수준의 혜안이 아니다. 그저 ‘피고인’ 측 주장을 받아쓰기하는 수준을 넘어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자신들의 권한을 발휘해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다. 2심의 재판부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면서 끓어오르는 마음을 달래본다.

[출처] <맘울림>, 2018년 9월 통권 제43호
이글은 <햇순>(공동체성서연구) 2018년 9월호에도 기고되었던 글입니다.

정혜진
신앙인아카데미 운영위원, 이화여대 강사, 기독여민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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