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우정을 나누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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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우정을 나누는 글쓰기
  • 한상봉
  • 승인 2018.10.23 00: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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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가톨릭일꾼에서 글쓰기 훈련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글 쓰는 재주를 배워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기도와 공부와 행동을 명료하게 통합해보려는 노력입니다. 떨어낼 망상은 삭제하고, 부족한 생각은 보완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보자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처럼 ‘글을 쓰는 것도 실천의 하나’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향해 똑똑하게 발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읽고 쓰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둘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

<서재를 떠나 보내며>(더난, 2018)를 지은 알베르토 망겔은 “모든 서재는 자서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돈키호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과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시집 등이 없는 삶은 상상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즐겨 읽고 서재에 꽂아둔 책의 목록을 보면 “누가 우리의 친구이고 또 누가 우리의 친구가 아닌지를 말해준다.”고 했지요. 

“우리는 어떤 사람의 애독서 목록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그 사람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여부도 미리 알 수 있다. 그래서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이다.”

제 경우에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 때문에 절친이 된 이도 있습니다. 윤동주와 김소월, 백석과 김수영, 황지우와 이성복의 시집만으로 행복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도로시 데이와 토머스 머튼, 헨리 나웬과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리지 않고 제 삶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구티에레즈와 레오나르도 보프 같은 해방신학자들의 글은 언제나 제게 감동을 주었던 것이고, 이러한 마음의 향방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망켈은 이렇게 덧붙이지요. “내가 도서관에서 하는 선택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뽑아 드는 행위는 내가 상상하는 천국의 좌표를 잡아주고 내 정체성을 확립시킨다.”

 

사진=한상봉

어떻게 쓸 것인가

역시 글이란 영혼을 달뜨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기원전 8년 로마의 시인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Publius Naso)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로마에서 추방당한 이유도 ‘글’에 있었습니다. 황제에게 두려움을 안겨 준 나소의 시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만큼 강력한 내용이었을 겁니다. 그 언어에 생명이 담겨 있었을 테지요. 그래서 살아있는 진정한 인간은 너에게, 또는 세상에 대고 할 말이 있습니다. 굳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앞질러 발음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너로구나!” 필립 라킨은 “나무들에서 잎사귀가 생겨난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이라고 했습니다. 

뉴욕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칼럼 매캔(Colum Mccann)은 <젊은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엑스북스, 2018)에서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밤에 ‘내가 꼭 글을 써야만 하는가?’ 하고 자문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곤 “세상의 운명이 내 글에 달려 있기라도 한 듯이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태한 글쓰기에 경종을 울리는 말입니다. 이를 매캔은 ‘버스이론’이라고 합니다.

작가는 오늘 몫의 글쓰기 작업을 마치고 다시 평범하기 그지없는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머릿속엔 여전히 침묵의 문장들이 가득 차 있고, 잠시 딴 생각을 했는지, 보도에서 걷던 발을 헛디뎌 차도로 침범합니다. 갑자기 쉭 하며 몰아치는 바람. 빵 하는 요란한 경적 소리. 훅 끼쳐오는 진한 기름 냄새. 비명소리. 버스가 몇 센티 차이로 당신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구원받은 것은 당신의 삶이며, 당신의 글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남겨진 기도는 이런 겁니다. “내가 떠나야 한다면. 신이시여, 부디 내게 마지막 문장을 쓸 수 있는 존엄을 허락해 주소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처럼 절박한 무엇이 있어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말일 겁니다. 허섭스레기 같은 글로 세상의 나무들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일 테지요. 글쓰기란 제 운명을 돌보는 일입니다. 목숨을 걸고 글을 쓸 필요는 없지만, 글에는 나의 기도와 갈망, 나의 경험과 지혜, 행동의 이유가 스며 있습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글을 쓰지 않으면, 메모라도 남겨두지 못하면 정작 ‘내 영혼의 망명정부’를 세울 도리가 없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내 인생에 ‘필터’ 하나 세우는 일입니다. 사방에서 들이대는 망상에 휩쓸리지 않고, 나와 하느님 사이에 가로놓인 거름망으로 내 삶을 걸러내는 일입니다.

 

사진=한상봉

막연한 사랑은 없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전문적인 작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기를 쓰듯이 성찰하고, 편지를 쓰듯이 진지해질 필요는 있겠지요. 막연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너를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어렵습니다. “너가 누군지 모르지만 사랑한다.”는 말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면, 그 믿음이 교리와 신조에 대한 동의(believe)를 넘어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faith)라면, 우리의 사랑은 명료해야 합니다. “그분을 믿긴 믿는데 그분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어”에 머무는 신앙은 신앙행위를 낳지 못합니다. 이런 믿음은 대부분 ‘구복신앙’입니다. 

구복신앙은 상대가 누군지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내 문제를 해결해 줄 강력한 힘을 소유한 하느님으로 족합니다. 그 권력 앞에서 빌고 또 빌어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면 그만입니다. 허나 히브리 노예들이 빌고 또 빌어서 하느님께서 모세를 불러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먼저 그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듣고 느끼시고 움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빌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처럼 살자고 초대할 뿐입니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숭배자들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과 맺은 우정을 기대합니다. 그분이 먼저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제도종교 때문에 눈 먼 신앙인이 되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또렷이 알아야 합니다. 모르는 분을 사랑할 수 없으니까요. 왕이나 구세주를 존경하고 섬길 수는 있지만,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자’고 청합니다. 

읽고 쓰고 말하기

가톨릭일꾼은 애매한 사랑에서 분명한 사랑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합니다. 흐릿한 신앙에서 명료한 신앙적 확신 안에서 행동하자고 제안합니다. 글쓰기를 매개로 책 읽는 법을 다시 배우고, 매일 같은 겪고 있는 경험에 대한 신앙 감각을 키우고, 나의 고유한 언어로 내 생각을 타인에게 전하고, 복음 안에서 행동하자고 제안합니다.

수도자들이 아침마다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 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목소리로 제 곡조에 겨워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좋으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 이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8 10-11월호(통권 15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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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녜스 2018-10-23 18:34:36
꼭 수강하고싶은데...주일 오후에 오고가기가 멀어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