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안에서 우리를 만지시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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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안에서 우리를 만지시는 그리스도
  • 미건 맥켄나
  • 승인 2018.10.2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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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고 부드러운 자비의 주님이시여,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비, 당신의 연민이
당신의 상처에서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큰 자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

성경은 땅에서 울부짖는 예언자들의 피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묵시록은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양을 증언하는 순교자들의 피에 대하여 말한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떤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2-17).

이분 그리스도, 거룩한 피의 수호자는 하느님의 양이라고 불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인데,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다. 이분은 요한 묵시록에서 외치는 양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있다”(묵시 1,17-18).

 



2001년 4월 29일 강론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위로의 말들이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의 눈길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그분의 확실한 현존을 경험하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 조건이 아무리 복잡하고 극적이어도, 부활하신 분은 되풀이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지만 이제 나는 영원히 살아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자다.

“처음”이라는 말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원천이요 새로운 창조의 첫 번째 열매라는 뜻이다; “마지막”은 역사의 결정적인 종말을 뜻하고; “살아있는 자”는 죽음에 영원히 승리를 거둔 고갈될 수 없는 생명의 원천을 뜻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구세주 안에 우리는 골고타에서 제물로 바쳐진 양의 모습을 알아본다. 그분은 당신을 고문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허락하고 뉘우치는 죄인들에게 천국의 문을 연다. 우리는 이제 “죽음과 저승의 열쇠”(묵시 1,18)를 가진 영원불멸의 용의 얼굴을 일별한다.

전례를 위한 응답송 후렴은 시편 118장 1절이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자애는 영원하시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설교를 계속한다:

우리가 노래하고 있는 시편 저자의 환호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주님의 자애는 영원히 계속된다! 이 말들의 진리를 철저히 이해하기 위하여, 전례로써 구원사건의 핵심에 이르자.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의 삶 그리고 세계의 역사와 일치시킨다. 이 자비의 기적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바꾼다.

이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의 충만함을 펼쳐 보이는 기적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분의 유일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의 희생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멸시받고 고통받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은 놀라운 연대에 찬사를 금할 수 없다. 이 놀라운 연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모든 상상할 수 있는 기준을 넘어서며 우리 인간의 조건과 연결시킨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아들의 부활 후에도, “아버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인간에 대한 그분의 영원한 사랑에 충실하시다. … 이러한 사랑을 믿는 것은 자비를 믿는다는 것과 같다...”

죽음과 죄보다 강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에 감사하자. 그분의 사랑은 우리 일상생활 속의 자비로 드러나고 실천에 옮겨지며, 이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게 “자비”를 품도록 촉구한다. 그분은 사랑으로 가득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분이 아닌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모든 세례 받은 사람과 전체 교회는 생명의 프로그램을 실천해야 하지 않는가

이 자비가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이 자비가 십자가의 상처로부터 흘러나온다. 이 자비는 모든 예수님의 말씀의 원천이요, 치유, 용서, 사랑의 샘이다. 이 자비는 그분 삶의 의미요, 죽음 속에서도 그분이 가졌던 충실함, 그리고 말씀으로, 성찬례와 다른 모든 성사들, 공동체, 용서로 우리에게 머물기 위하여 죽은 이들로부터 들어 올려진 그분의 권능. 그분의 상처 안에서 드러나고 열린 이 하느님의 마음은 오래된 하느님의 상징이요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이다. 하느님은 지치지 않고 우리를 찾아다니시며, 우리의 마음은 쉬지 않고 하느님을 찾아간다.

초기 교회의 설교가들 중의 한 사람인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썼다: “마음으로부터 은총을 청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어떻게 그 은총을 허락하지 않을 것인가? 그분은 은총을 청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엄청난 은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 만일 그분이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려는 가장 강렬한 갈망을 지니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그분께 기도하도록 재촉하거나 거의 강제로 기도하게끔 하지 않으실 것이다.”

성경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의 형상은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그 원천을 발견한다. 예수님의 이 마음의 자리는 우리가 사는 곳이고,

우리의 영혼, 우리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내적 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그곳은 항상 하느님의 현존 속에 있다. 우리가 그 하느님의 현존에 깨어있든 무심하든 상관없이 그곳에 있다. 동방 그리스도교의 고대 작가인 죤 클리마코스는 이 마음의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의 영혼의 옷을 주님께 잘못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실로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짜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철저히 단순해지도록 하자. 세리와 돌아온 작은 아들은 말 한마디로 하느님과 화해했다." 

그리고 그 단순한 기도 한 구절은 “주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였다.

이 자비는 우리 동맥 속의 피와 같고, 우리 폐 속의 공기와, 우리가 걸어가는 땅과 같고 우리의 일상 생존에 기본인 물과 같다. 그것은 청하기 전에 주어지고 확대되는 자비요, 용서이다. 우리를 구원하고,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며, 현재를 바꾸고, 거룩한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비이다. 우리의 영혼을 바꾸어 하느님의 순결함, 올곧은 마음과 올곧은 정신을 지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자비이다.

그리고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지구에 대한 사랑, 심지어 특별히 우리가 “적들”이라고 이름붙인 존재들까지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자비이다. 실제 삶에서 우리 사랑의 넓이와 깊이에 대하여, 애덕을 실천하는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관대함과 용서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자비이다.

진리를 묻는 것이 자비이다: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는가?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큰가?
누구를 위하여 울고, 누구와 함께 고통을 겪으며, 누구와 연대하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과 타인들의 회심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교회와 세계의 지도자들의 회심을 위해서도 기도하는가?
권력의 결정에 의하여, 국가들에 의하여, 해를 끼치는 경제 행위에 의하여,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에 의하여 파괴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당신 자신의 가족, 친지들, 공동체들, 당신의 조국 이외에 다른 이들, 다른 나라와 공동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하느님께 피로 울부짖는 모든 무죄한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낙태된 아기들, 굶주림, 방치, 깨끗한 물의 부족, 약품부족, 가뭄에 의해 죽은 이들은 탐욕과 세계화 정책에 의해 발생하고 악화된 기아 때문에 죽어가는 이들은 또 어쩔 것인가?
폭격, 지뢰, 침략에 의해 고통받는 무죄한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리고 단순히 지리적으로 잘못된 곳에 살고 있어서, 아무 잘못도 없이 자신들이 또다른 사람들의 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인종 때문에, 종교적 믿음 대문에, 성별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성문화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살해되고 고문 받고 수치스럽게 대우받고 실종되는 사람들은 어쩔 것인가?"

이것이 마음의 기도, 자비의 울부짖음이다. 다른 인간존재의 닫힌 귀와 굳어진 마음 때문에 그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끌어안고 고통을 겪는 거룩한 피의 수호자가 현존하는 모습이다. 우리는 자비를 부르짖지만,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세계 안에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의 자비를 우리는 그들에게 돌려주고 있는가?

나렉의 그레고리는(951~1010) 자비의 기도를, 개인의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울부짖음이라고 썼다. 다음은 우리 모두가 자비의 현존 앞에 서서 그 자비를 구하며 하는 기도이다:

착하신 주님, 자비의 샘이여,
선물을 주시는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구해주소서,
친절하게 우리를 대해 주소서,
위험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소서.

우리의 비참함을 굽어보시고,
우리의 의심을 없애주시고, 우리를 무너뜨리는 고뇌 속에서
우리를 타락으로 이끄는 취약함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소서.

우리가 병들었을 때 의사가 되어주소서.
우리의 불쌍한 신음 소리를 친절하게 들어주소서,
혼란의 심연, 침묵 속에서 일어나는 한숨소리를,
먼지로 사라지는 우리의 사지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여 주소서.

주님 예수여, 우리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우리에게 귀 기울여 주소서.
당신 홀로 전능하시고 거룩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시여.
우리는 당신이 오심을 기다리고
당신의 자비를 굳게 희망합니다.
당신 발아래 엎디어 입맞춤합니다.
우리의 빚을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우리의 죄를 인정합니다.

한없는 관대함으로 넘치는 분이시여,
친절하게 우리의 말을 들어 주소서,
인류의 친구시여, 인내하시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온유하신 분, 당신은
낮에는 선함으로 가득하시고, 끝없는 빛이십니다.

당신 홀로 우리의 영혼에,
비록 마지막 숨을 쉴 때에도,
끝없는 구원을 주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과 함께 당신에게
영원한 영광이 머무시기를 빕니다. 아멘.

자비. 자비. 주님, 당신의 백성에게 자비를. 그렇지만 거룩한 피의 천상수호자 앞에 서서, 우리는 지상에 하느님의 자비가 되라고, 우리의 말과 판결과 결정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되라고, 우리가 만지고 다른 인간존재를 보살필 때에 하느님의 자비가 되라고, 그리고 우리의 적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되라는 간곡한 권고를 받는다.

거룩한 피의 천상수호자는 우리를 만지기 원하고,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 부터 오늘 이 지상에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이 되도록 이끈다. 

[출처] <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 미건 맥켄나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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