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는 가난한 백성의 '양호실'이며 '항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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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는 가난한 백성의 '양호실'이며 '항구'다
  • 스잔 화이트
  • 승인 2018.10.2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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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적 영성이란 무엇인가?-3

"혀가 고백하는 것을 마음은 청원한다."(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우리는 우리 영성의 전반적인 건강이 전례 참여에 질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렇지만 전례전통의 영성은 우리에게 그 반대로 생각하도록 초대한다. 즉 전례 참여가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다.

전례전통의 영성은 우리에게 ‘교회가 전례에서 행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살아가고, 우리 자신의 영적 행위를 전례에 적용시키고 전례가 지닌 양성적 영향에 우리 자신이 스며들도록 내어맡기라’고 초대한다. 이것이 전례전통의 전반적인 비전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교회의 공동 기도는 영적 생활에 무엇을 기여하는가?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만일 전례가 그리스도인의 신심 생활에 기반이라면, 그 기반은 어떤 요인들로 구성되는가

전례전통의 영성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전례는 다음의 여섯 가지 다른 방식으로 영적 자원이 된다. 전례전통 안의 다양한 기류가 어떤 특정한 때에 이런 방식이나 저런 방식을 강조할지 모르지만, 전례전통의 역사 내내 이 여섯 가지 방식들은 모두 작용한다.

 

사진=한상봉

a. 기도와 묵상을 위한 용어

전례전통의 모든 대표자들에게, 전례는 중요한 기도의 학교이며 무엇보다 그리고 최고의 영적인 교사가 된다. 전례의 기도들은 나머지 우리의 삶 전체를 차지하는 기도의 모형이 된다. 전례의 이미지들과 몸짓들은 우리의 종교적 상상력을 만들어주고 거기로부터 우리의 기도가 부상한다. 또한 전례의 행위들은 명상의 형태와 내용을 만들어준다. 이에 덧붙여, 전체 전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실제에 관한 모든 우리의 기도에 기반이 되어준다.

전례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 안에서 시작되고 다른 성사들에 의하여 양육되고 강화되는 그리스도 안의 삶에 관한 긍정적인 가치관들을 배운다. 그는 사명의 초월적인 가치를 알게 되고, 교회의 전체적인 완전함을 향하면서 신비체의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자신의 개인적인 거룩함의 가치도 알게 된다.

전례전통의 모든 대표주자들은 영적인 삶을 심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례를 위하여 모인 회중의 기도에 몰입하고 그것이 다른 형태의 기도들을 형성시키는 원칙이 되도록 허용하라고 조언할 것이다.

물론, 전례의 방식들을 ‘배우기 위하여’ 우리는 부지런해야 한다. 전례전통의 한 7세기 대표자는 이것을 다른 형식의 배움과 비교한다:

"만일 꽤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도, 세상의 예술학교에서 초보 수위의 지식조차 거의 획득할 수가 없었다면,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원하고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간절히 원하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필요 하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전례 안에서 단지 기도에 관한 교훈들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전례를 위하여 모인 회중들로부터도 기도에 관한 교훈을 배운다. 전례전통의 영성의 증언은 ‘고독 속에서도’, ‘독방에서조차’ 교회의 구원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때문에 더 선명하고 한결같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우리는 헌신적인 실천을 배운다.

b. 영적인 훈련의 형태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의 핵심을 형성시키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삶을 이루어나가는 데에 필요한 유일한 영적인 훈련은 아니다. 전례 행위에서 다양한 형태의 열심한 연습들의 모형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전례전통은 이러한 연습들을 배우는 학교로서 전례가 기능한다는 점을 반복하여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주 그의 사목적 배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동 예배의 각 요소들에 관하여 묵상하도록 제안하고 있다.

히포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하는 조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구절을 암송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에 관하여 시편작가의 “발자취를 따라 걷도록” 예배자들을 초대한다:

"이 시편에서 말하고 고양되는 사람은, 천상 예루살렘을 갈망하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발걸음들의 노래다…. 당신이 비록 아직도 순례 중에 있다 하여도 장차 그곳에 있을 것에 대하여 성찰해 보라. 이미 그곳에 도달하였다고 상상하며, 천사들의 불변의 기쁨과 당신자신을 연결시켜 보라."

이러한 묵상적 가시화에 덧붙여, 전례 안에 자리 잡은 다른 영적 훈련들은 그리스도인의 헌신적인 삶의 모형을 만든다. 단식, 다양한 형태의 속죄 행위, 침묵, 순례 의식들, 기념 축제, 자선 등 이 모든 행동들은 전례에 의하여 양성되기를 허용하는 사람들에게 습관이 되어간다.

전례전통은 대부분의 이 “형성 과정”이 점차적으로 일어나고, 교회의 공동 기도가 뚜렷한 영적 환경에 있는 사람들 안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추측한다. 18세기의 한 전례전통의 대표자는 이 점을 어떤 강론에서 지적하고 있다:

"올바르게 구성되고 정착된 공적 신심 행위에 의하여, 우리는 계속하여 우리가 알고 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각성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항상 똑같은 말과 표현에 의하여 행해지는 한, 그것들의 항시적인 사용에 의하여 우리 마음속에 너무나 견고하게 각인이 될 것이므로 그것들을 삭제하거나 소멸시키는 일은 쉽지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그것들은 여전히 모든 기회에 떠오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전례는 다른 어떤 ‘문화’처럼 기능한다. 즉, 끊임없는 특정한 행위들의 강화에 의하여 그리고 의미를 추구하는 공동체 안에 이러한 행동들을 설정함으로써, 전례는 충실함을 격려한다.

어떤 전례전통의 현대주자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전례의 자녀들’이 되는 만큼, ‘우리는 전례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사진=한상봉

c.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영역

"새로운 경이! 우리의 전능하신 주님께서 육체를 지닌 피조물들에게 불과 성령을 음식과 음료로 주신다."(시리아의 에프라임)

전례가 그리스도교 영성을 받쳐주는 세 번째 방식은 예배자들이 거룩한 존재와의 만남을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마련하는 것이다. 전례전통의 다른 이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다;

"예수님이 오래전에 한때 오셨고, 불확실한 미래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달리, 전례는 창조되지 않고 창조하시는 말씀이시며, 과거,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전체 시간을 충만하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움직인다."

전례전통의 영성이 전례의 정신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배자들이 거룩한 권능에 자신들을 맡길 때에 그들을 회복시키고 쇄신시키는 일을 삼위일체가 적극적으로 행하는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전통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거나 ‘마술적인’ 과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에 예배자들이 기꺼이 다가가기를 요구하는 과정이다. 주님의 최후 만찬에 관한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 중의 하나는 이러한 받아들임을 고양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오라, 피를 흩뿌리는 그대 사람들이여.
그리고 하느님이 특별히 주는 것을 받아들여라.
내적인 은총의 외적인 표징,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했으니, 받아들여라.
표징은 표현된 것을 전달하고,
은총은 사용되는 방법에 따른다."

우리가 하느님과 만나게 되는 영역인 전례에 대한 이런 생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에 드러나 있다. 이 문서는 전례가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신비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룩한 은총의 흐름을 얻도록 해 준다고 말한다.

d. 하느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징표들, 상징들 그리고 예식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복잡하고 다측면이며 매우 자주 그 관계를 표현하거나 묘사하는 일은 우리의 능력을 초월한다. 전통에서 전례는 그 관계에 대한 우리의 ‘중요한 이야기’가 된다. 전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기회를 허락한다. 전례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을 표현한다. 교회의 공동 기도에서 예배자들은 그들의 한숨을, 찬양을, 불안을, 그들의 죄책감과 욕망을 소리 낼 수 있게 된다.

20세기의 상반기에 전례전통의 대표주자였던 에블린 언더힐은 이렇게 말한다:

"보이지 않는 사랑과 인간의 관계의 전체 서사시가 전례 안에 숨겨져 있다. 역사에 뿌리를 박고, 눈길은 영원에 고정하며, 찬양과 탄원, 속죄와 기쁨이 뒤섞인 폭발과 함께 전능한 곡조에 파묻혀 각 영혼의 신심을 에워싸며 앞으로 나아간다."

전례전통의 영성을 대변하는 모든 사람들은 전례 안에서 인간 존재들이 하느님 앞에 가장 열리고 취약해 질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런 연유로, 사랑과 믿음은 가장 고귀한 표현의 형태에 도달한다.

다시 한번 우리들은 인간의 마음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존재적 경험에 의하여 ‘훈련을 받는다.’ 왜냐하면 전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과거와 현재에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전적인 그리스도교적 체험 안에 우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종말의 때에 그 관계의 정점에 도달하기를 고대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취약하고, 뒤죽박죽이고 침묵할 때조차, 우리는 여전히 전례에 의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고 있다:

살아계시는 하느님과의 현재 만남과 과거의 만남이 기억되고 있는 자리인 전례는 백성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며, 외적인 의미, 들을 수 있는 소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내적인 흐름의 힘과 여세에 의하여 그 전체가 음악으로 변한다. 그때에, 바위를 매끄럽게 만드는 강력한 강의 물길이나, 스스로 힘을 받아서 돌아가는 바퀴처럼, 전례적 예배의 흐름은 자체의 규칙적인 흐름에 의하여 운율과 리듬, 그리고 수많은 다른 형태와 구성물들을, 더 중요하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고려되지 않았으며, 이름이 없는 것들을 창조해낸다.

전례는 ‘영혼의 가장 모호한 방들을 여는’ 길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로부터 철저하고 본질적인 정직성 같은 것을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전례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그 경험을 심화시킨다.

e.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공동체의 모형

전례전통에 있어, 그리스도교적 전례 기도의 형태와 내용은 신앙 공동체의 안팎에서 생겨나는 인간관계의 모형을 마련함으로써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의 형태와 내용을 위한 견본이 된다. 진정한 거룩함의 비전을 통하여, 하느님과 다른 인간 존재와의 화해 행위를 통하여, 그리고 미래 세계의 모습과 내용을 통하여 전례는 다른 이들과 우리의 모든 관계들을 다시 정리한다. 전통에 관한 현대 루터파의 대변자인 고든 래트롭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회중, 일요일, 목욕, 말씀, 식사, 기도와 직분들은 루터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말하고 이끌어내기를’ 요청받고 있다. 회중의 말씀과 징표는 그러므로 세상에 새로운 빛을 비추고, 오직 무의미만 있는 곳에 의미를 제시하고, 하느님 앞에 정의를 제창하며, 하느님 앞에 온전한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구조들을 상대화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다른 이념도 보완시키지 않으면서, 너무나 확실하게 그리고 감동스럽게 그렇게 한다."

f. 영적 위기 때의 힘

1세기의 시작부터, 전례전통은 선명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전례는 시련, 유혹과 격랑의 시기에 영적인 식량의 원천이 된다. 크리소스톰은 전례를 ‘병원이고 항구’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례를 검, 혹은 갑옷 한 세트, 그리고 방패라고 했다. 전례전통의 초기주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특별히 현존하는 곳마다 악마가 의로움의 일들에 맞서기 위하여 잠복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하느님께서 특히 현존하시므로, 악의 세력에서 어떤 보호를 받는 것이 특별하게 요구되었다.

전례전통의 모든 주자들은 치유하고 지탱시켜주는 전례의 힘에 주력해 왔다. 위대한 신학자인 로버트 바클레이는 전례의 이러한 힘을 자전적으로 증언한다;

"하느님의 백성이 침묵 중에 모인 곳으로 들어갈 때에, 나는 마음에 와 닿는 어떤 비밀스러운 힘을 그들 가운데에서 느꼈다. 그리고 내 안의 악이 약해지고 선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나는 그들과 결합하게 되고 일치하면서, 이러한 힘과 생명이 늘어난 후에도 점점 더 허기를 느끼게 되었다."

전례전통에서 이러한 측면을 자주 깨닫게 해주는 것은 소외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사회의 권력구조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가장 조용한 소리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특별히, 공동의 기도는 ‘길르앗의 발삼제’와 같다. ‘영혼이 죄로 아픈’ 이들을 위한 약이 된다. 그리고 회중의 전례는 약으로 치료하는 양호실과 같다.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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