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상태바
페미니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 승인 2018.10.22 23: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살아가는 이야기-갈]

2년 전, 내게 그것이 왔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그것과 함께하자 그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데도 화가 났고, 그 화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고 속에 남아 나를 피곤하게 했다. 주위에서는 나를 쓸데없이 예민하다고 했다. 그동안 탄탄대로는 아니었어도 나름 편안했던 삶이 못내 너저분해진 것이다. 그러면 그걸 무시할 법도 한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편안했어도 다시 돌아가는 건 나에 대한 기만 같고,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 전처럼 편안할 것 같지 않았다. 그게 뭐냐고? 그 이름도 눈부신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더 그랬다. 초등학생 때 양성평등 글짓기 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내린 결론은, ‘과거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무분별하게 일어났으나 현대로 오면서 거의 사라졌고 오히려 역차별이 심심찮게 일어나므로 남녀 모두 서로를 존중한다면 완전한 양성평등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였다. 그리고 쭉 그렇게 믿었다. 역차별이 있지만 아직까지 여성이 불평등을 겪고 있는 건 맞으니까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으나, 누릴 건 다 누리면서 불평만 하는 꼴페미는 되기 싫었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서 사치를 부리는 김치녀, 된장녀를 비난하면서 나는 개념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런데 2016년, 한 사람이 죽었다. 범인은 화장실에 숨어서 7명의 남성을 지나쳐 보내다가 여성이 오자 그녀를 찔러 죽였다. 검경은 이를 범행동기가 없는 ‘묻지마 살인’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은 이유는 명백했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 범죄는 여성표적 범죄이고 여성혐오 범죄이다. 많은 여성들이 이 관점에 동의하여 추모 행사가 열렸고 인터넷 상에서는 토론이 이루어졌으며, 나는 페미니즘에 눈을 떴다. 갑작스러웠으나 충격적이거나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매우 자연스런 조우였다.

당시 가장 큰 이슈는 여성혐오였다. 여성혐오는 미소지니(misogyny)의 번역인데, 단순히 여성을 싫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의 능력과 주체성을 무시한 채 남성의 시각으로 여성을 타자화, 대상화, 일반화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여성 비하뿐만 아니라 모성 숭배 등의 여성숭배도 여성혐오에 포함된다. 이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세상에 불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문기사에서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ㅇㅇ녀’라고 한다. 만화에서 여자들은 가슴이 크고 예쁜 여자를 질투하고, 능력 좋은 여자들은 성격이 나쁘고 친구가 없다. 한 광고에서 여자들은 명품백을 선물받고 싶어서 남자친구를 사귄다. 남자가 생활력이 없으면 ‘장가가야겠다’고 하는데, 여자가 생활력이 없으면 ‘시집가면 안 되겠다’고 한다. 성범죄 기사에 달린 댓글은 범죄자를 욕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부주의함을 탓한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늘 탈인간적인 이해심과 사랑으로 자식에게 헌신하는 존재로 표상된다. 창세기에 하와는 왜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쓰여 있을까? 왜 천주교에 여성 사제는 없을까? 왜 개발되지 않은 구역을 처녀지라고 할까? 왜 영화에서 여자들은 엄마 아니면 창녀 아니면 성녀밖에 없을까? 요리랑 뒷정리는 여자가 다하는데 제사는 정작 왜 남자들만 지낼까? 카페 데리고 가는 엄마는 맘충인데 아빠는 왜 라떼파파일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던 남성 시인들은 왜 어머니와 누나의 젖무덤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걸까?

이런 문제의식과 함께 내 가치관도 변화를 맞이했다. 그리고 내 삶은 피로해졌다. 그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혹은 즐겁게 마주하던 것들이 불쾌하고 싫어졌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화장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하는 모든 삶의 양상에 여성 혐오가 없는 곳이 없다.

화가 난다. 그 화는 내게도 향하지만 남들에게 더 많이 향한다. 왜 저 사람들은 저런 행동을 하지? 왜 저렇게 무지하지? 나 또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여성혐오를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고 거북한 말을 해대는 사람들을 보면 참 답답하고 한심하기도 하다.

페미니스트 간 논쟁도 힘이 든다. 요즘 가장 대두되는 용어는 ‘탈코르셋’이다.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 스스로가 주체화하지 못하도록 ‘아름다운 여성’으로 타자화 된 여성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치마보다는 활동이 편한 바지를 입으려고 한다. 탈코르셋 운동을 한 여성 중 일부가 탈코르셋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탈코르셋 운동을 비난한다.

한 때 뜨거운 감자였던 것은 ‘미러링’이다. 여성이 받는 언어폭력을 거울에 비추듯이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다. 또 다른 폭력을 생산하기도 했고, 잠재적 우군이 될 수 있는 남성들을 잃어버리는 전략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반면, 미러링은 그 전까지 바른 말로 반박할 때는 듣지도 않고 오히려 비웃거나 무시했던 남성들의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또 거울 속의 똥이 더러우면 똥을 치우면 되지 거울을 부수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갈등이 있다. 3040 페미니스트들이 결혼하고 출산하고 화장하고 꾸밈으로써 가부장제와 코르셋을 타파하지는 못할망정 더 강화시켜왔다고 주장하는 일부 1020 페미니스트들과 그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 그 하나이다. 또 (신체적 성별[sex]과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을 동일하다고 느끼는) 시스젠더 여성의 권리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소외되는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도 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부유하면서 고민하고 있다. 다들 나름의 논리가 있고 이유가 있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는 까다롭고, 막상 내 주위에서 페미니즘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여성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 와중에 들리는 소식은 비참하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죽였는데, 때렸는데, 몰카를 찍었는데, 찍어서 올렸는데, 그걸로 돈을 벌었는데, 검경에서는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기사 댓글에서 여성이 비난받는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남성을 때리거나 죽이거나 사진을 찍거나 모욕하면, 남성 범죄자가 그랬을 때보다 더 심한 처벌을 받고 더 욕을 먹는다. 그래서 동일범죄 동일처벌 집회를 하는 가운데 페미니스트들끼리 싸우고, 밖에서는 욕을 한다. 이 난장판이 분명 내가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에도 있었을 텐데, 왜 그 전에는 아무 것도 몰랐을까?

피곤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는 것은 부당하며, 페미니즘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마땅한 방법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아직 잘 모르지만 알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성평등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더디지만 세상은 분명 변화하고 있다. 이 난장판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과정이고, 결국 나를, 내 삶을 한층 더 인간답게 만들 것이다.

[출처] <맘울림>, 2018년 9월 통권 제43호


요즘 우리 사회의 여성문제를 주시하고 있는 청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