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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생각-'나'뿐인 세상, '돈'뿐인 세상

[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33]

항상 그렇듯이 요즘도 시끄러운 세상이다. 왜 시끄러운가 들어다 보면 그 이유도 비슷하다. ‘나’와 ‘나’의 싸움이다. ‘나’뿐이라는 세상에서 ‘나’의 앞에 ‘나’와 함께 살아가는 ‘너’와 ‘남’은 그저 ‘나’란 존재에게 주어진 조건일 뿐이다. 이용가치가 있으면 이용하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그냥 지나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이용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은 ‘돈’이다.

결국 있는 것은 ‘나’뿐이고, 그 ‘나’는 ‘돈’이란 기준으로만 산다. 공부를 하는 이유도 ‘돈’이고, 결혼을 하는 이유도 ‘돈’이다. 누군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그 사람이 ‘돈’이 되는지 혹은 ‘돈’을 잘 버는지로 결정된다. ‘돈’을 잘 벌지 못하면 당장 힘든 시선을 이겨내야 한다. 이용가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도 ‘남’도 없이 ‘나’뿐인 세상이지만, 그 ‘나’도 결국은 ‘돈’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그러한 세상이다. ‘돈’ 앞에서만 고개를 숙일 뿐이다. ‘돈’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 공금을 마음대로 자신의 것으로 빼돌려도 그렇게 부끄럽지 않다. ‘돈’이 이용가치의 수단인 세상에서 이런 비도덕적인 짓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당당하다.

 

권정생 선생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요즘이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나만이 잘 살자는 이기심은 극을 치닫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돌려줘야 하는 것이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평등의 원칙이며, 그게 평화로 이어지는 자연의 질서입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더 원하고 ‘남’의 것도 ‘너’의 것도 모두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평등은 없다. 나와 너 그리고 남은 평등해서는 안 된다. ‘나’를 중심으로 있어야 하고 ‘너’와 ‘남’은 ‘나’에게 그저 이용해야할 그 무엇일 뿐이다. 참 슬픈 일이다.

과거 어느 대통령이란 사람도 ‘돈’만을 위해 살았고, ‘돈’을 위해 ‘너’도 없고 ‘남’도 없고 ‘나라’도 없고 그저 ‘나’뿐이라 살았다. 그리 살면서 더불어 산다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믿어 버린 것인지 나쁜 짓도 참 많이 했다. 그의 욕심에 누군가를 죽기도 하고 누군가는 말하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실력이라 생각하는지 당당하다. 부끄럽지 않다. 자신이 재판장에 서는 것 자체가 ‘국격’의 문제라며 나타나지 않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도리, 그 인격을 상실한 이에게 속아 산 것이 우리에게 부끄러운 과거이고, 이제라도 이를 바로 잡으려는 것은 ‘국격’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바로 살겠다는 당당한 행동임을 그는 정말 모른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던 권정생 선생은 이 세상 험한 꼴을 모르고 사셨던 것 같지만 아니다. 오히려 자연 속에서 자연에게 평화와 평등을 느끼며 이 험한 꼴을 더 잘 느끼며 슬퍼하신 것 같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함께 있는 사회구조로서는 절대 민주주의가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부자는 그 부를 지키기 위해 권력과 결탁을 할 테도 가난한 사람은 굶어죽을 수 없으니 자연히 권력에 맞서 싸워야하니까요. 가난한 사람의 목숨도 목숨입니다. 살기 위하여 누군들 자기 몫을 찾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나’뿐인 세상, 도덕이고 무엇이고, 그저 ‘돈’으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진 자에게 유일한 행복의 원천은 ‘돈’이다. 그리고 그 ‘돈’을 사용해 권력과 결탁하고 더욱 더 단단하게 자신만 부자인 세상,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홀로 누리는 세상을 만들어가려 할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이익 집단이 국회의원에게 돈을 건네주었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그러니 그 이익 집단에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시선으로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권력은 돈을 좋아한다. 권력은 ‘나’만 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가지기 쉽고, 그런 이들은 남이 바치는 돈을 좋아라 하고, 그들의 보호자가 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의 아픔은 지워진다. 그러나 막상 가장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들이다. 가난한 사람 말이다. ‘나’는 ‘나’다! 이 말이 좋아 보이지만, 이 말은 잘못하면 ‘너’도 ‘남’도 지우고 ‘나’와 ‘돈’만 바라보게 한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정말 행복을 누리는 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나’는 진정한 행복을 누린다. 그리고 그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그 행복은 ‘나’뿐이라는 마음에선 오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외로워질 뿐이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바로 그 진정한 행복은 ‘너’와 ‘남’ 그리고 ‘나’란 존재가 ‘우리’란 이름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마주하는 그 더불어 삶의 공간, 만남의 공간에서 가능해진다.

부자와 가난한 이의 다툼도 이 둘 사이, 돈으로만 서로를 보지 않고 나의 앞에 너, 그리고 그 너와의 만남 속에서 따로 떨어진 두 ‘나’가 아닌 하나의 ‘우리’라는 더불어 삶에서 해소될 수 있다. 너에게 나를 내어 줄 수 있는 만남의 세상, 더불어 삶의 세상, 요즘 그 세상이 그립다. 그 세상이 오면, 요즘 우리를 시끄럽게 하는 과거의 욕심 가득한 권력자들도 지금의 사립 유치원 문제도 없을 것인데 말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말을 조용히 생각하며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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