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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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한다"
  • 미건 맥켄나
  • 승인 2018.10.1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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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눈길을 매우 단순하게 천국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며, 기쁨의 절정에서나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나오는 감사에 넘치는 사랑의 외침이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열게 하고, 예수님께로 나를 가까이 묶어주는 거대하고도 초자연적인 힘이다."(리지외의 데레사)

잠언에는 거룩한 침묵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구절이 있다: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고 예지를 친지라 불러라”(잠언 7,4). 지혜와 침묵은 일란성은 아니어도 쌍둥이 자매라 할 수 있고 서로 매우 닮아 있다. 지혜와 침묵은 삶에 대한 관점을 준다–지구, 시간, 관계들, 정의, 악, 국가들, 구조들, 신학과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관점이다.

지혜와 침묵은 모든 것이 솔기 없는 통합을 이루고,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거룩하게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하느님의 원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지혜의 발치에 앉을 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침묵한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침잠한다. 우리는 고요해진다.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시편 131,2).

그리고 그 고요함 안에서, 우리는 말을 넘어서고, 말의 더 깊은 의미 아래에 있는, 그 핵심에 있는 것을 알아듣게 된다. 이 지식, 이 지혜는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맛볼 수 있는” 것이라고 시편에 묘사된다:

"나 언제나 그분을 찬미하리라.
내 입에 늘 그분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이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들은 듣고서 기뻐하여라.
너희는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다 함께 그분 이름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내게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원하셨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
(시편 34,2-7. 9)

 

by Kiko Arguello

시편은 끊임없이 하느님, 거룩한 지혜의 가르침을 드러내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절망 속에 울부짖거나 이해를 찾고 있는 사람에게 영감을 보여준다. “당신께서는 가슴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남모르게 지혜를 제게 가르치십니다”(시편 51,8). 그리고:

"하느님, 당신의 생각들이 제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것들을 다 합치면 얼마나 웅장합니까
세어 보자니 모래보다 많고
끝까지 닿았다 해도 저는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시편 139,17-18)

성경은 지혜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를 말해준다: “인간의 지혜는 그 얼굴을 빛나게 하고 굳은 얼굴을 변화시킨다”(코헬 8,1). 또한 우리는 지혜가 별로 기대하지 않는 숨겨진 장소에서 발견되며, 모든 사람이 지혜의 가르침을 감사하거나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한다:

"나는 태양 아래에서 이런 지혜도 보았는데 이는 내게 위대해 보였다.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조그만 성읍이 있었는데 막강한 임금이 거기로 진군해 와서 그곳을 포위하고 거대한 공격 보루를 구축하였다. 거기에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지혜로 성읍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하였다, '지혜는 힘보다(영웅주의) 낫다.' 그러나 가난한 이의 지혜는 멸시 당하고 그의 말은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다. 지혜로운 이들의 조용한 말이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에 있는 군주의 호령보다 더 들을 가치가 있다. 지혜가 무기보다 낫고, 죄인 하나가 큰 선을 망친다."(코헬 9,13-18)

그리고 복음서에서, 모든 지혜서들은 훌륭하다. 예수님, 거룩한 지혜가 말한 많은 것은 무시되고 나약하게 여겨지고 실천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지혜는 악에 대한 저항에 있어 비폭력적이고 연민과 용서의 힘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의 가르침 모음의 많은 부분은, 예를 들면 산상수훈(마태 5,38-45) 같은 곳에서, 지혜는 억압, 폭력의 문화와 공격적으로 권력이 남용되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엄성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자주 그분의 지혜의 가르침을 먼저 옛 가르침의 구절에서 시작하고 다음에 반박하거나 첨가함으로써 놀랍게도 대안의 가르침으로 변화시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38-45)

우리는 아직도 이 말씀들을 읽을 때 반항하고, 거룩한 지혜, 거룩한 침묵의 현존 속에서 이 말씀들에 대해 충분히 성찰하지 않는다.

간디는 예수님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폭력 저항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는 실질적이고 해방을 가져온다. 예수님과 그분의 백성은 점령지역에서 살았고, 자주 군인들이나 권력자들에게 뺨을 맞았다. 오른 손에 의해 오른 뺨을 얻어맞았다. 그것은 불평등을 보여주는 비하적인 뺨맞기였다. 그리고 맞는 사람은 감히 돌려 치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치는 지배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두 번 생각해 보도록 하는 응답의 길을 열어놓는다. 당신이 다른 뺨, 왼쪽 뺨을 내놓는다면, 당신을 다시 치려는 사람에게는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된다. 치는 사람들이 뺨을 대등하게 하려면 당신을 곧장 다시 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뺨을 대등하게 인정해야 하는 그 곤란한 상황에 빠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속옷을 가지려고 재판을 거는 사람에게 당신이 돌아서서 겉옷을 주려고 할 때에 벌어질 것이다.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분명한 필요에 무감각하고 욕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법에 따라 당신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할 수 있으나 당신이 천 걸음을 돌려받지 않고 계속 간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지식에서 태어난 지혜이다. 신학자인 월터 윙크는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절들은 너무나 급진적이고 본질적이며, 결코 이전에 없었던 주장이고 너무나 위협적이어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수십 세기가 걸리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이 되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침묵의 경청, 회심과 변화에 대한 열림, 그리고 지혜 그 자체의 현존 안에서 가장 최고로, 가장 철저하게 배울 수 있다. 홀로 혹은 다른 이들과 함께 기도하며, 거룩한 지혜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성되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일단 이 지혜를 경험하고 나면 지혜는 우리 안에 다만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을 알고 싶은 지칠 줄 모르는 갈망과 염원의 씨를 뿌린다. 모든 신학, 철학, 영성, 그리고 헌신은 한 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하느님을 알고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다른 이들을 위한 그 지혜의 육화를 이루는 것이다. 모든 앎은 한 가지 원천으로 이끌린다:

거룩한 지혜로.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렇게 썼다:

"지혜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덕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정의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평화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진리와 생명과 구원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된 까닭은 모든 시간 내내 하느님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그리고 영원히 그 지혜와 침묵 속으로 더 깊숙이 사라지기 위해서이다. 많은 성인들은 이 거룩한 지혜,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분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것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노르위치의 쥴리안은 이렇게 썼다:

"나는 그분이 우리에게 선하고 편안한 모든 것임을 보았다. 그분은 우리의 옷이다.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고, 끌어안으며, 부드러운 사랑으로 온통 우리를 휘감으신다. 그래서 결코 우리를 떠나시는 법이 없다."

그리고 요안 비안네의 말:

"내적 삶이란 사랑의 바다와 같아서 그 안에 영혼이 잠기고, 말하자면 사랑 속에 익사하는 것과 같다. 어머니가 손으로 아기의 얼굴을 잡고 키스로 온통 덮듯이 하느님도 열심한 사람을 그렇게 잡으신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나는 네 자신이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를 더 사랑 할 수 있다. 나는 네 자신이 너를 보호하는 것보다 천 배나 더 너를 지킬 수 있다. 네가 더 충실하게 네 자신을 나에게 줄수록, 나는 너를 더 보살필 것이다. 너는 나에 관한 지식을 더 명료하게 얻을 것이며 나의 사랑을 점점 더 즐겁게 경험할 것이다."

거룩한 침묵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지혜가 당신을 꼭 붙잡도록 하라. 그리고 지혜가 당신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 당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당신의 몸을 진정시키도록 하자. 침묵이 당신의 얼굴과 눈을 부드럽게 하고 당신에게 부족한 것을 하느님께서 채우도록 하라. 앉아서 거룩해지라. 고요하라 그러면 지혜를 알게 된다. 지혜는 당신이 와서 귀를 기울이기를 기다린다.

[출처] <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 미건 맥켄나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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