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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 그리스도가 내 음식이듯, 나는 그리스도의 음식전례적 영성이란 무엇인가?-1

아우구스티누스는 재치와 힘이 넘치는 젊은 청년으로, 쇠락해 가고 있는 로마 제국 시기에 한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문에서 자랐다. 당대의 무수한 종교적 철학적 선택들에 매료되어, 그는 어머니의 신앙에서 멀어져 방황했으며, 이미 35세의 나이에는 삶의 풍부하고도 다양한 잔치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니카의 학식이 풍부한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이고 다정다감한 영적 자서전들 중에 속한다고 인정받는 자서전 <고백록>을 우리에게 남겼다. 이 책은 그를 다시 그리스도 교회 안에 끌어들인 하느님의 끈덕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중에 특별히 놀랄만한 한 구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적인 미래가 자신의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유혹을 경고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상기한다. ‘너는 마치도 일상의 음식이 하는 것처럼 나를 너의 실체로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고, 네가 나의 실체로 변화할 것이다’라는 구세주의 말을 듣는다.

부활한 그리스도와 이런 방식으로 만난 것을 묘사하면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례전통’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 견고하게 자리 잡는다. 그는 교회의 공동 예배의 핵심을 구성하는 말씀과 명상, 행동의 관계들이 영적 삶에 관한 성찰에 있어 으뜸가는 자원들이라고 당연히 여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여 빵을 나누는 주님의 식사는 심오한 영적 통찰을 일으키고 반향을 불러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가 택한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는 자기가 추구한 것이 아니라 추구함을 받은 것이다. 그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닮게 빚어질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빚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성체 안에서 그의 음식이 되는 것처럼, 그는 그리스도의 음식이 될 것이다.

 

영성의 ‘전례전통’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영성의 ‘전통’에 관하여 말할 때 대부분의 경우, 그 경계는 매우 명확할 수 있다. 보통 이 경계는 창립자(혹은 창립 문서)의 의도에 따라 정해지는데, 하느님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특유한 방식의 비전이 어떤 운동을 시작하도록 하며, 특정한 방식으로 하는 경건함의 훈련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쏠리게 된다. 어떤 특정한 영적 전통에 자의식을 갖고 일치하는 개인들과 그룹들은 그것을 수행해가고 확장시키는데, 그 전통의 근간에 있는 이상들의 일반적인 틀거리 안에서 그렇게 한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회의 전통으로부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관한 통찰을 요청받는다면, 우리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의 삶, 글라라의 영적 권고의 서신들, 프란치스코의 방식을 따른 후기 사람들의 성찰과 실천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고려해야 할 자체의 자원들이 있을 것이고, 따라서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고 무엇이 제외되어야 하는 가에 관한 결정들도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전례전통’의 영성에서 그 경계를 정의하는 일은 이처럼 간단하지 않다. 이 영성에는 단 한 사람의 창립자도 창립문서도 없다. 그리고 전례전통이 언제 확립되었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때조차 확실하게 그 경계를 말할 수가 없다. 참으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례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자체만큼 다양하다. 그들은 동방과 서방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들이다. 그들은 트라피스트들과 베네딕토인들, 도미니코 회원들과 프란치스코 회원들이다. 그들은 장로교인들이고 성공회원들, 루터교인들과 퀘이커교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영적 삶의 성장을 위한 근본적인 원천이 교회의 공동 예배에서 발견된다고 명확하게 그리고 시종일관 말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례전통이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동방정교회 전통의 해석자가 말하는 것처럼, 전례전통의 영성의 핵심은 “전례를 내면으로부터 이해하고, 전례가 담고 있으며 소통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출현’, 세계와 삶을 발견하고 경험하며, 그 비전과 힘을 우리 자신의 실존에, 우리의 모든 문제와 기꺼이 연결시키려는 의지”에 있다.

그러면 이러한 전례전통의 대표자들에게 전례는 그리스도교인의 영적 삶에 기본 양식이며 일반적인 규칙으로 받아들여진다. 전례전통에 관하여 어떤 현대의 대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교회가 전례를 기념할 때에 사용하는 방식을 자기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받아들인 그 영성에 ‘전례적’이라는 단어를 부여한다.”

그리스도교 전례와 그리스도교 영성 사이의 이러한 변증법적 움직임은 벌써 1세기부터 시작된다. 바오로 성인이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삶을 지향하며 쉼 없이 나아가라고 격려할 때에, 그는 그들의 공동 예배를 교사로 여기도록 촉구한다(1코린 11,17-32).

바오로 사도는 그들이 성찬례 기념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를 알아보고 나누라는 부르심에 초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오로에게 이것은 단순히 빵과 포도주의 나눔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나 신심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는 만일 코린토인들이 공동체로서의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간의 분열에 의하여 부서지는 것을 허용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아무리 그들이 성찬례 때에 경건하게 성체를 나눈다 해도 변질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한다.

이러한 바오로의 주장은 모든 미래의 전례적 영성의 모형을 세워준다. 즉 교회의 공동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의 본보기와 내용을 마련해준다는 것이다.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6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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