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세상을 위해 화해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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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세상을 위해 화해하는 사람들
  • 짐 윌리스
  • 승인 2018.10.08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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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시 세우기-1

첫 번째 설교에서, 예수님은 말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이것이 교회의 메시지다. 그러나 슬프게도,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 말씀을 지지하는 방식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증거는 다른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즉,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미국의 경제, 정치, 그리고 군사체제의 문화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교회들은 그들의 고백대로 살지 않는가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주의자들이고, 성령에 대한 아무런 실제적 체험이 없으며, 개인주의자들이고 공동체에 대한 실제적 투신이 없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인 척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재산을 축적하지 않을 것이고, 실제로 서로를 사랑할 것이고, 각자가 가진 모든 것을 서로 나누고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며, 그리고 마치 한 가족처럼 서로를 대할 것이다. 이렇게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진=한상봉

불신앙의 이유: 고백과 일상의 너무 큰 차이

한때 나는 교회가 스스로 말한 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대부분 의지가 부족하고, 좋지 않은 의도들, 그리고 자기-이익 추구라고 생각하였다. 한편으로 이런 모든 이유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나는 그 이유들이 훨씬 더 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잊어버리는 잘못이 있다. 우리가 누구이고 누구에게 속하는 가를 잊는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하느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언제나 우상숭배에 빠졌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생활에서 제공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한 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력에 저항할 힘이 없다. 아니 더 심하게는, 저항의 필요조차 보지 못하고 있다.

진실은 우리가 단지 병든 의지, 취약한 의도들, 혹은 맹목적인 자기-이익 때문에만 마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더 깊다. 교회에서, 우리의 하느님과의 친교 그리고 서로와의 친교가 너무나 약하고 제한되어 있어 말하는 대로 살아갈 자원과 힘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의 고백과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확실하게 보이는 일상생활 사이의 엄청난 신뢰의 격차가 우리 시대 불신앙의 원인이고 우리의 정치적 순응과 영적 냉담의 근본 이유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으므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가짜 안전으로부터, 가짜 가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가짜 신들에 대한 숭배를 물리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그분 나라의 승리를 주장하고 살아낼 수 있을까?

 

사진=한상봉

세상을 위해 진짜-교회가 되라

모두가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같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광범위한 동의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동의는 끝난다. 다양한 의견들이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어떤 사람들에게, 우리 문제들에 대한 답은 말씀의 설교다 – 복음 전파를 통한 쇄신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대답은 성령에 대한 체험으로 쇄신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답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정의를 위한 정치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사람들은 국가권력과 폭력에 대한 저항행위가 답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다른 장소, 다른 전통, 그리고 교회에 대한 경험이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으며, 위에 열거한 답들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대답들은 이러한 우리의 다양한 역사에 속하는 부분들이다. 그 대답들은 모두 맞는 대답이다. 그것들은 교회 생활에서 나타나는 크고 명백한 결핍들을 말하고 세상에서 교회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좀 더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러나 이 모든 대답들은 다 부적절하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필요는 단순히 복음을 가르치는, 케리그마(kerygma)가 아니다. 또한 정의의 섬김, 디아코니아(diakonia)도 아니고, 성령의 은사에 대한 체험, 카리마스(charisma)도 아니며, 왕, 권력에 대한 도전, 프로페테이아(propheteia) 조차도 아니다. 우리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코이노니아(koinonia), 단순히 교회가 되라는 초대-서로 사랑하고 세상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바치라는 초대다.

지역 교회의 차원에서 살고 숨 쉬고 사랑하는 신앙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다른 모든 대답들의 기반이다. 복음을 선포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고, 사회행동을 하며, 예언자적 증언을 하는 것 하나 하나는 궁극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실제적인 위협을 가하지 못한다. 특히 전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육화하는 공동체와 분리되어서는 더욱 더 위협이 되지 못한다.

신앙 공동체의 지속되는 삶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하고 볼 수 있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는다. 교회는 신앙의 명분에 양분을 주는 공동체를 재건하라는, 진정한 교회가 되라는 초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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