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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틸리오 그란데, 엘살바도르의 거룩한 아이와 함께 있는 사제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

"수많은 시냇물로부터 만들어지는 샘은 마르는 법이 없다.
우리들이 사라지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자리를 채울 것이다."

루틸리오 그란데는 영원히 백성들에게 속한다. 특히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속한다. 그는 백성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을 섬겼으며, 그들에게 성사를 거행하였다. 그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했고, 그들과 함께 희망과 자유를 추구하였으며, 그들로부터 배웠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고 함께 죽었다. 그의 삶은 루이스 구아넬라의 다음 말을 반영했다:

“믿고 느끼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가난한 이들을 돕지 않고서는 그들의 노고와 박탈을 지나쳐 갈수 없다.”

루틸리오 그란데가 표현했던 도움은 성경의 말씀 안에서 백성들과 함께 살았을 때 가장 뚜렷했다. 그때 루틸리오는 폭력과 박해 가운데에서 구원자인 그리스도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는 것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켜준 것이다.

루틸리오는 백성들의 목자였다. 착한 목자인 예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내기 위하여 노력한 착한 목자였다. 그는 혼란과 가난한 이들의 봉기 때에 살았다. 그때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권을 위하여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일어섰다. 또한 존엄성을 지니고 살아가며 그들 자녀들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하여 움직였다.

이때는 또한 잔혹하고, 무죄한 이들의 살해, 대학살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백성들과 함께 일어나고 그들이 목소리를 내도록 도운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던 때였다. 가르치고, 소공동체와 함께 일하며, 말씀의 봉사자들에게 설교하고 격려하던 루틸리오의 일상생활은 요한 복음의 다음 구절에 뿌리를 두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4-18)

그리고 예수님은 그분의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나이든 교리교사와 한 소년과 함께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움직이고 있을 때, 루틸리오는 매복해 있던 괴한들의 공격을 받았고 자동차는 총탄의 세례를 받아 구멍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잔인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살해되었다.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백성들이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점점 더 확신을 갖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루틸리오의 끈질긴 목소리는 큰 교회와 살바도르 전국에 퍼져나갔던 초기 외침들 중의 하나였다.

1980년대에 엘살바도르에서는 정의를 위한 봉기와 투쟁 중에 8만 9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살해되었다. 루틸리오의 죽음은 살바도르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알려주었고, 그들 편에 서고 보호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회심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가장 고귀하고 가장 예외적인 경우는 루틸리오의 잔인한 살해에 의해 영원히 그 흔적이 각인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회심이었다.

 

로메로 대주교와 그란데 신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친구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총알의 숫자에 넋이 나간 사람은 로메로였다. 친구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수의를 입히면서 로메로는 가끔씩 정치적 견해는 달랐지만 친구였던 이 사람에게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증오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물으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가 마을의 소박한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말했고 현존했던 것이 그러한 분노와 위협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루틸리오 그란데의 죽음은 주교의 회심을 가져오고 정화시켰다.

다음날 옥외에서, 설교하고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손을 떨었던 주교는, 점점 눈에 보이게 강해졌다. 백성들은 루틸리오의 영이 주교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엘살바도르의 성령의 권능은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주교의 연민이 점점 커가는 가운데에 희망과 용기를 더 풍부하게 증가시켰다.

루틸리오가 낙오된 이들, 가난한 이들, 농민들, 엘살바도르의 백성들에게 표현하였던 감동의 사랑은 로메로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루틸리오의 죽음은 대주교로 하여금 국내, 국제문제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했으며, 점차 궁극적으로는 대주교도 말과 현존으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어느 날 대낮의 전례에서 정부, 군대, 대지주들에게 종교생활에 있어 정의의 실천이 불가피한 부분임을 역설함으로써 살해되는 결과까지 가져왔다.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했으나, 그분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만질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고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며, 길가에 썩도록 버려지고 감히 가족들이 데려다가 묻을 수도 없는 사람들의 몸이다. 그분은 감히 정의를 외치는 백성들의 몸이다. 교리교사들과 주민 조직가들, 위험과 배반 앞에서도 서로를 도왔던 평범한 사람들의 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전례와 사람들 가운데에 여전히 현존하고 성령 안에 살아계시며, 사람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정의와 생명을 위하여 계속 일하도록 가르치시는 분이다. 이분 그리스도와 이 사람 루틸리오는 침묵 중에 선언한다:

“이 불꽃들, 인간의 영혼들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한다.”

인간적 상처로 가득한 예수님의 몸은 모두에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고 선포한다. 특히 그분과 똑같은 고통과 죽음을 겪은 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나 이 고통과 죽음에 대한 면역력은 시작부터 존재한다. 하느님은 돌이킬 수 없게 생명의 편에 계시고, 먼지로부터 생명을 창조하며, 생명을 꽃피운다. 마침내는 생명의 사자를 보내시는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다. 참으로 피를 나눈 형제를.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 장례식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키우시며 증오와 살인의 복수가 퍼져나가기를 용납하지 않으시며 거부하신다. 오히려 우리들의 하느님, 구원자 그리스도는 세상의 강한 사람들에게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쉽게 발견된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단 한번 그리고 영원히 결정하신다. 그분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 가운데에 머무시기로.

오늘날 하느님의 성인들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녀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고 그들과 함께 있기를 선호하고 모든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구원자이며 모든 국가들의 판관이고, 정의는 우리들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분을 통하여 모두가 하나이고, 그분을 통하여 영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의 지체들이고, 모든 세대가 그분의 영광입니다.
선함에, 아름다움에, 지혜에,
정의로운 존재에, 모두가 함께 하기를.
그분께 영광이 이제와 영원히 함께 하기를."

[출처] <자비가 넘치는 그리스도>, 미건 맥켄나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1년 9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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