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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아닌 세례자를 선택한 예수예수와 임박한 전쟁-1
  • 알버트 노우런 신부
  • 승인 2018.10.07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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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비단 개인과 국가들, 인종과 문명의 차원뿐 아니라 전 인류의 삶과 죽음에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는 지구라는 이 행성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대는 이러한 전쟁의 문제가 해결될 수도 없으며 인류의 전멸을 향하여 곤두박질치고 있는 이 현실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나자렛의 예수도 범위는 작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문제에 시달렸음이 분명하다. 그 당시 많은 유다인들은 세상이 묵시적 파멸의 낭떠러지에 걸려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명과 연결하여 예수가 어떻게 이 문제를 파악했으며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알아들어야 한다.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예수는 이 재앙을 헤쳐 나갈 방법뿐 아니라 인류를 위한 완전한 해방과 성취의 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로마는 기원전 63년에 팔레스타인을 식민지화하였다. 각 식민지에다 그 지방 출신 통치자를 임명하는 정책에 따라 로마는 헤로데를 유다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예수는 이 헤로데의 집정시기 중 기원전 4년에 태어났다.

헤로데의 사후, 유다왕국은 그의 세 아들에게 분배되었다. 아켈라오 헤로데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되는 사람들의 불만과 봉기를 다룰 수 없었고 이어 로마총독이 파견되어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가 12살 때 일이었다.

로마의 직접통치 이후로 유다의 역사에 있어 최후의 그러나 가장 혼란했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최후의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도성과 민족 자체의 거의 완전한 파멸인 기원후 70년과 기원후 135년의 최후 멸망에 이르러 끝난다. 이러한 시기에 예수는 살았고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가 형성되던 무렵에 죽었다.

 

예수의 세례는 이 위기의 시기에 다양하게 응답했던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그가 세례자 요한과 함께 하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의 시대에 대한 응답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달랐던 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의 그 당시 예수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로마가 유다와 사마리아를 장악했을 때 그들은 징세를 목적으로 인구와 자원을 조사하였다. 유다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의 지도자는 갈릴래아 사람인 유다스였고 그는 종교적 정신에 입각한 해방투사단을 조직하였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대부분 유다인들은 신정, 즉 그들이 하느님의 선택된 국가이며 그분 홀로 그들의 왕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불충실을 뜻했다. 젤로트파(열혈당)는 충실한 유다인들로서 느슨한 지하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어떤 때는 여러 분파로 갈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식카리 단체와 제휴하기도 하였다. 60년 동안 그들은 산발적인 폭동과 게릴라전으로 로마 점령군을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그러면서 점차 그들은 혁명군으로 조직되었고 마침내 기원후 66년 로마군을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4년 후 로마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전멸시켰다.

바리사이들은 유다인들 중에 또다른 집단이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견지에서 로마인들에 대항하였고 6천 명의 바리사이들은 로마의 황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하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은 젤로트파처럼 무기를 들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들이 너무 불리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 대부분은 중산층이었으며 저항하면서 로마에 세금을 내었다. 그리고 유다법과 전통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였다.

그들은 선조들의 율법과 전통에 불충실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에 넘겼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들의 우선적인 관심은 이스라엘 자체의 개혁이었으며 바리사이라는 이름이 뜻하듯이 그들은 “분리된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충실한 잔존자로서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이 오직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을 사랑하시며 장차 로마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킬 구세주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다.

엣세네파는 바리사이파보다 훨씬 더 완전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막에서 독신으로 금욕주의적 삶을 살기 위하여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들은 세상종말이 가까웠다고 믿었다. 구세주가 암흑의 아들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로마인들을 멸망시키러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젤로트파처럼 호전적이었으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후 66년 젤로트가 로마를 전복했을 때 엣세네파도 합류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젤로트가 전멸될 때 함께 전멸되었다.

사두가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귀족출신이었다. 사제장과 원로들로 구성되었으며 상류지배계층을 이루었다. 사제장은 사제층에서도 특별한 집단으로 제물을 봉헌하는 역할 뿐 아니라 성전의 조직과 관리를 총책임지고 있었다. 사두가이들은 보수파였으며 가장 오래된 유다전통을 고수하고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등 새로운 사상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로마인들과 협력하고 기존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또한 유다에는 일단의 무명작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바리사이나 에세네파 출신으로 묵시문학에 몰두하였다. 이들은 역사에 대한 하느님 계획의 신비를 믿었으며 특히 세상의 종말이 그들에게 직접 계시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종교 정치운동과 사조 가운데에서 마치 반대의 깃발처럼 우뚝 솟아오른 한 사나이가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매우 달랐다. 그는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처럼 불운과 파멸을 예고하였다.

초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신하여 왕이나 지도자들이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후기 예언자들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개인들이 속죄하고 각자가 인격적인 비움의 변화를 체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례자 요한은 그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기억한 사람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파국을 예고하고 각자 그리고 모두가 비움의 변화를 해야 한다고 외치는 하느님의 목소리였다.

예수는 이것을 믿었고 다가올 파멸에 대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결심한 사람들의 대열에 가담하였다. 그래서 그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는 모든 면에서 요한과 동의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후에 가서 그는 요한과 어떤 측면에서는 분명히 다르게 나타났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수가 요한의 기본적인 예언을 받아들였다는 증거는 결정적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예수는 요한을 거부하고 세례를 거부했던 모든 이들과 근본적으로 결별하였으니 열혈당파, 바리사이들, 에세네파, 사두가이파, 율법학자 그리고 묵시작가들이 바로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들이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이스라엘 전부를 거슬러 예언하는 그런 예언자는 믿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예수의 출발점은 바로 이스라엘에 다가오고 있는 심판, 결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대재앙이었다. 예수가 이러한 예언을 그의 생애 동안에 계속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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