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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모어, 6시간 노동으로 충분히 행복한

[김경집 칼럼]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OECD가입국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노동한다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근면, 절약, 저축’을 외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스스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교조를 떠받들며 성장한 뒤에도 우리는 늘 죽어라 일만 했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지금의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기실 그 발전이라는 것도 과거와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현재의 보편적 기준에 맞춰 그렇다는 게 아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게 지금 우리가 않고 있는 노동 시간 논쟁의 핵심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최저임금제와 더불어 노동시간 단축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고 경기가 사위고 있다고 떠들어대는 건 웃기는 일이다. 정작 자영업자들에게 저승사자와도 같은 과도한 임대료와 부당한 이자 소득 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면서.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우리에게 토머스 모어는 없는가?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으로 제안했다. 유토피아 섬에서는 일도 중요하지만 여가의 소중함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주민들은 한 가지 일로 평생을 사는 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2년 주기로 오가며 다양한 기술을 익히며 살아간다.

거기에서는 누구나 유용한 일을 하면서도 과소비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은 풍족하고 노동력은 남는다. 공공사업마저 없을 때는 노동시간을 줄인다. 토머스 모어는 하루 6시간씩 일해서 한 주에 30시간의 노동이면 사람이 부족함 없이,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을 받지 않는다고 여겼다. 물론 꿈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왜 그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꿈’ 같은 이야기를 그토록 진지하게 토로했을까?

인간의 삶에서 노동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갈수록 노동의 강도와 시간은 증대하지만 그에 맞는 보수와 대가는 지지부진이고 상대적 박탈감은 오히려 더 커진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노동하지 않으면서 그 노동의 대가를 독식하는 세력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모어는 소수의 필요 이상의 과도한 욕망의 실현을 위해 절대다수가 과도한 노동에 신음하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죽비를 날린 것이다. 500여 년 전의 이야기다.

모어는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삶은 희망도 없는 밑바닥의 상태에 신음하는 당시 현실을 풍자 비판하면서 ‘누구나’ 노동하고 사치하지 않는다면 하루 6시간의 노동만으로도 충분히 필요한 것을 마련하면서 누릴 수 있는 삶을 강조한 것이다. 그 ‘이상’을 깨뜨리는 건 ‘이상한 탐욕’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항상 우위에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소수 부유계층에 자본이 집중돼 분배구조의 불평등이 악화된다고 지적했다. 그 불평등의 구조를 개선하지 않고는 전체의 부가 증가해도 오히려 불평등만 악화되고 노동의 가치는 농락당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경제의 상황에서 결실은 극소수가 독식하고 부담은 다수의 약자에게 전개하는 일이 이미 서구사회에서는 용도 폐기된 신자유주의의 올무에 갇혀 벌어진다.

열심히 일해서 정직하게 살며 꾸준히 저축해도 ‘정상적으로는’ 집 한 채 마련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수십 채의 집을 보유하고 거기에서 만만찮은 집세를 거둬들일 뿐 아니라 집값도 나날이 천정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그들로서는 일거양득이다. 그 소득의 대부분은 힘없는 노동자들이 뼈 빠지게 일해서 바친 결실이다.

노동은 신성하다. 그러나 그 신성함이라는 말을 누가 쓰는가? 노동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하고 진정으로 노동이 신성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뱉는 건 야만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주 52시간 노동에 대해 질겁하고 너무 빠르다며 손사래 친다.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경영을 훨씬 더 합리화하여 전체적인 경제 구조를 바꿨어야 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며 버텨왔다. 그런데 그 동안 자기 이익 확대에만 몰두하여 그런 본질적인 일은 나 몰라라 하다가 이제 와서 경제 상황 운운하며 발목 잡는 모습은 흉하다. 물론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입장에서는 현실의 상황이 녹록치 않아서 힘들고 원망의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분노의 대상을 정확히 인식하고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유럽은 주 27시간 노동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고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52시간 노동에 대해서도 비현실적이라며 질타한다. 과연 우리가 동시대에 살고 있는가 물어야 한다. 물론 환경과 조건이 동일하지 않다. 역사적 과정도 다르다. 그러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기본적 요건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 52시간 노동에 대해 우려하는 주범들은 우리 사회의 부를 독점하면서 노동시간 줄이기를 외면하는 자들이다.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처절한 요구가 ‘저녁은 있겠지만 일자리를 찾으러 방황하는 시간’일 것이라며 조롱하는 수구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분노보다 연민이 느껴진다. 그들도 그 주범의 한 패거리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우리에게 토머스 모어는 없는가?

 

사진출처=pixabay.com

공정함이 없으면 정의도 없다

정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는 대표작 <정의론> 이전에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는 논문에서 아무리 다수의 행복을 산출하는 것이라 해도 그 과정이나 절차가 공정하지 못하다면 그 결과 또한 공정할 수 없다며 정의의 바탕은 바로 그 공정성에 있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그의 이론의 출발점이자 전체 핵심을 관통하는 일관된 철학은 바로 이 공정성에 있다고 지나치지 않다. 과연 지금 우리 사회가 경제가 공정한지에 대해 냉정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며 반성하는 게 당면한 경제 문제와 노동 시간 문제의 기본적 태도다.

누구나 나의 행복이 커지길 원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얻어지는 행복은 아무리 그게 적법하다 해도 행복일 수 없다. 도덕성(morality)은 적법성(legality)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 바탕은 인격성(personality)에 두고 있다. 지금 논쟁중인 주 52시간 노동시간의 문제를 인격의 문제에서 접근해야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노동시간과 기업의 성과가 무관하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글로벌 정보기술기업들은 직원들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을 주는 데에 노력하고 있다. 구글과 아마존은 이미 주 4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그건 선진국들 가운데서도 선진적 기업들이기 때문이라는 타박은 옳지 않다. 생산성을 높이는 건 노동자의 몫이기 이전에 경영자의 몫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을 개편해야 하고 높은 수준의 재교육과정을 마련해야 하며 경영은 보다 더 합리적이고 투명해야 한다. 그 비용이 아깝고 지금 노동할 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니 자신의 몫은 외면하고 노동자의 희생만 요구하는 한 미래는 없다. 생산성이 늘면 노동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게 되고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다시 생산성 증가로 이어진다. 그런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일에 무관심하면서 노동시간만 따지는 건 정말 후진 사고의 발상이다.

영국의 신경제재단(NEF)은 2030년까지 노동시간을 주 15시간으로 단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전 단계로 2021년까지 노동시간을 주 21시간으로 줄이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이 일자리를 나눈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냥 단순히 일자리를 나누면 각자에게 돌아갈 소득은 줄어든다. 개인의 욕망을 누르는 게 아니라 공동체적 가치와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토대로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 이제는 어엿한 세계 경제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그런데도 생각은 20세기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노동시간이 길면 생산성이 증가한다는 사고 속에 갇혀있다. 자신들이 했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고 그동안 모든 이익을 독식했으면서 기껏 한다는 게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시간을 줄이면 경제가 더 악화될 것이라고 협박한다.

지금은 21세기다. 언제까지 이따위 타령을 후렴처럼 반복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토머스 모어가 되지는 못해도 적어도 공정함은 지키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살고 있지 않다. 유럽은 우리보다 잘 사니까 운운하며 눙칠 일이 아니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면 적어도 그 삶을 따라잡아야 한다. 탐욕부터 내려놓고 공생의 삶을 모색해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 37~40)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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