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신제’ 교황도 사임할 수 있다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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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제’ 교황도 사임할 수 있다는 희망
  • 한상봉
  • 승인 2018.09.26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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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28

“오늘날의 현실은 많은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신앙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는 질문들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스리고 복음을 전파하려면 영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강건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난 몇 달 동안 나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내게 맡겨진 직무를 수행하기에 무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이유로, 완전한 자유의사에 따라 2005년 4월 19일 추기경단이 제게 맡긴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의 주교 직분에서 물러날 것을 선포합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2013년 2월 28일 20시부로 성 베드로 좌와 로마의 주교 좌는 공석이 될 것이며, 새로운 주교를 선출하기 위해 법적으로 자격을 갖춘 추기경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콘클라베가 열릴 것입니다.”

 

베네딕토 1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거룩한 결단

85세의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13년 2월 11일 오전 바티칸에서 일하는 추기경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해 2월 28일 교황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 자리에 있던 프란치스코 아린제 추기경은 “교황께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지자 추기경들은 놀라움으로 서로 쳐다보았고, 마침내 침묵이 흘렀다.”고 전했다. 이어 “그분은 교회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 당신이 떠나고 다른 분이 이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다.”고 전했다.

교회법 제332조 2항에 따른 교황직 사퇴 요건은 “그 사퇴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올바로 표시되어야 하지만 아무한테서도 수리될 필요가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즉, 강압에 의한 사퇴는 무효라는 뜻이다. 종신제인 교황이 선종 이전에 사임한 사례는 1415년 동서 교회의 분열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가 사임한 이후 598년 만의 일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세상의 빛―교황, 교회, 그리고 시대의 징후>에서 “육체적 · 정신적 · 영적으로 교황 업무 수행이 어렵다고 느낄 경우 사임할 권리가 있다.”면서 “육체적인 면에서 내가 교황 업무를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고 의문이 들기도 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그동안 이 권리를 누릴 만큼 용기 있는 교황은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베네딕토 교황의 사퇴 결단은 의미가 깊다.

신체적 어려움과 교회 안의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좌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은 교황 종신제가 고착되어 있는 가톨릭교회 전통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건강상 이유든 무엇이든 교황 직무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은 교회에 좋은 선례로 남을 것이다. 실상 교황직을 제외하고는 가톨릭교회 직무 가운데 종신직은 없다. 추기경과 주교 등은 신분이지만 교회 직무를 의미하는 교황직이나 교구장직 등은 모두 정년이 있다.

전임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2005년 선종하기 전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을 맡고 있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을 “내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라고 불렀다. 그러나 라칭거는 밀라노의 대주교였으며 유력한 교황 후보였던 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처럼 연구와 집필을 위해 은퇴할 뜻을 1991년, 1996년, 2001년 세 차례나 비추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의 만류로 교황청에 잔류하다가 2005년 78세의 나이에 ‘베네딕토 1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베네딕토 교황의 사임을 두고 아린제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이는 주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선을 위해 일을 한다면 자신들의 지위를 양보하려 하지 않는 정부나 국가의 수반인 정치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이 보여 준 결단은 교회, 국가, 대학 혹은 기관이든 누구에게든지 교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권위와 기득권을 가지고 봉사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교훈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그는 누구인가》 56쪽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독일 출신으로 2005년 교황에 선출되었으며, 학자 출신의 첫 교황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라칭거는 추기경 시절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을 역임하면서 보여 주었던 보수주의 관점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전임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와 더불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개혁을 후퇴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

특히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는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책 때문에 라칭거 추기경에게 소환당해 곤욕을 치렀다. 결국 보프는 교권의 압력에 저항하다 1992년 사제직을 떠났다. 보프는 그동안 줄곧 교황을 비판해 왔는데, 독일 주간지 <슈피겔>과 인터뷰에서 “현 교황의 제1 관심사는 바티칸이라는 권력기구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며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회를 위한다면서 되레 교회의 목을 조이는 천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 아프리카를 방문해 “에이즈(AIDS)의 대응 방안으로 콘돔을 배포하는 것은 적절한 해법이 아니다.”라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당시 각국 정치권과 국제 보건 담당자들은 콘돔이 에이즈 바이러스의 확산을 80% 줄여 준다는 조사 결과를 무시하고 인간의 생명보다는 교리를 우선시하는 잔인한 처사라고 반발했다. 그 후 프랑스 가톨릭 신자의 43%가 교황이 사임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최근에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교황에 대한 신뢰도 추락했다. 주간지 <스테른>의 여론 조사를 보면, 미국뿐 아니라 고국인 독일에서조차 24%의 독일인만이 베네딕토 교황을 신뢰한다고 응답했으며,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뢰도 역시 17%로 추락했다.

게다가 바티칸 은행의 부정부패, 돈 세탁 등을 다룬 내부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교황청이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이른바 ‘바티리크스’(VatiLeaks)라고 부르는 교황청 유출문서에 따르면, 바티칸은행은 유력한 정치인들과 심지어 마피아의 돈세탁 경로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교황청은 스위스 출신 금융 비리 전문가를 고용해 개혁에 나서고 있었다.

 

요한 23세 교황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카이사르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세례를 받은 선교사들은 제3세계의 토착민들을 개종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권익 옹호 활동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재편하고,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가난한 이들 속에 투신해 왔다. 한편 지역교회 차원에서 그동안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 아시아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등이 폭넓게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재위한 지난 30년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낳은 이러한 활동들이 제약을 받으면서 활력이 크게 떨어지고, 다소 위축된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회가 ‘새로운 감옥’이 되어 간다는 극단적인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교회가 교황청을 둘러싼 소수 엘리트와 주교들에 의한 귀족정치로 회귀하고 있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이를 두고 페니 러녹스는 <로마 교황청과 국제정치>(한국신학연구소, 1996)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이 된 1978년 이래 이른바 ‘복고’라고 불리는 반개혁 움직임이 진행됐다.”고 비판했다. 결국 지난 30년 동안 가톨릭은 권력과 돈을 가진 카이사르의 교회와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풍요로운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를 위해 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한 변증(Apology for the Christian Faith)>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과부를 돕습니다. 그들은 고아를 괴롭히려는 사람들에게서 고아를 구합니다. 그들은 무언가 가진 것이 있으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줍니다. 그들은 이방인을 보면 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마치 친형제나 되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형제란 일상적인 의미의 형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느님 안에 있는 형제를 뜻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정치적 전략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따라 사는 길이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돈과 권력의 유혹을 통해 교회를 타락시켰다.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분명히 어떤 구조가 필요했지만, 4세기에 로마인의 법적 체계를 채택함으로써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인의 체계는 평등과 사랑, 그리고 가난함을 기반으로 한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를 본질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초대 교회에는 없었던 성직 계급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 국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돈과 권력을 제공했다. 일부 성직자들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부유한 교구의 주교직을 차지하려는 선거전이 폭력으로 치닫는 일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소박한 갈릴래아 사람 예수가 전파했던 메시지는 사그라졌고, 로마제국 지배자들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하느님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유지되었다. 교회는 오로지 카이사르에 속하는 속성들만을 하느님께 갖다 붙였다. 교황은 홍포를 걸치고 으리으리한 대관식을 거행하며 자신을 ‘성부(聖父)’라 부르게 했다. 교황은 높은 계단 위에 앉아 세상을 굽어보며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런 권위주의적 교회는 1869년에 열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을 선언함으로 극대화되었다. 교황은 모든 권한을 바티칸에 집중시켰고 주교 임명권을 가짐으로써 지역교회에서 주교를 선출하던 전통을 폐지했다. 절대 권력은 교황을 절대군주로 만들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가톨릭교회는 1958년 요한 23세 교황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세속적 전통이나 신학적 해석이 아니라 복음서에서 보증하는 봉사 직분으로 교황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요한 23세는 바티칸의 확고부동한 세속적 이익이 아니라 복음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또한 교회와 세속 권력 사이에서 교회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맺었던 동맹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미 종교개혁 시기에 에라스무스가 지적한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성직자들이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권위 있는 답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서, 교황직에서 정치권력의 특성을 배제하고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라고 요구했다.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교회가 세상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자신을 ‘완전한 사회’라고 여기며 취했던 ‘거룩한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교회 역시 인간의 제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게 요한 23세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좀 더 정의로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현대 세계와 협력하기를 요청했다.

요한 23세 교황은 공의회를 열면서, 그 자리가 신학적 토론장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 표현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교리’보다 ‘사목’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착한 목자’가 되기를 원했지 탁월한 신학자나 교리 해설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교황은 또한 주교들과 권한을 공유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함으로써 그러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개막 연설에서 교황은 주교들에게 “이제 더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예언자가 되지 말고 이 세상에 자비의 치료약을 제공하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교회의 권한을 교회의 구성원 모두와 나누어 갖기를 원했기 때문에, ‘교회는 (교계 제도라기보다) 하느님 백성’이라고 말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주교들은 더 많은 자유와 권한을 갖게 되었고, 평신도들은 교회의 일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라틴어로 봉헌하던 미사는 토착어(모국어)로 대체되었고, 종교적 자유와 문화적 다양성이 존중되었다. 또한 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특히 관심을 둘 것을 강조했고, 현대 세계와 다른 종교들과 대화할 임무를 부여했다.

바오로 6세 교황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과 <노동헌장 80주년(Octogesima Adveniens)>을 통해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이 겪는 참상 때문에 “현상 유지를 변호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해방신학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이들은 1968년 메데인 주교회의와 1979년 푸에블라 주교회의를 통해 ‘제도화된 국가 폭력’을 비판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했으며, 수만 개의 기초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로마의 지배와 성직 계급의 힘을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쇄신을 이루지는 못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은 신설된 시노드(주교대의원회의)를 통해 주교들이 교황과 결정권을 나누어 갖고, 각 나라의 주교회의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교황청의 역할은 축소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개혁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고 주교 선출권 및 다른 권한들을 지역교회에 돌려주기 위한 어떤 기구도 세우지 못했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가 재임하는 동안 이러한 개혁에 반발하던 중앙집권적 관료주의 세력들은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좌에 오르면서 지난 30여 년 동안 예전에 잃어버렸던 영향력을 대부분 되찾았다. 공의회 이후 바오로 6세 교황은 새로운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전진해 왔으며, 이를 계승하려던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이 급서한 뒤에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극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가장 상징적이며 실제적인 표현은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후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을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오푸스 데이 등 보수 성향의 교회 단체들을 적극 지원했다.

공의회 기간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방침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던 요한 바오로 2세뿐 아니라 라칭거 추기경은 “그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잘못 해석되어 왔다.”고 단언했으며, 지역교회들은 여기에 충격을 받았다. 자유주의적인 네덜란드 교회가 제일 먼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해방신학적 견해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교황청은 여전히 주교 임명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교황은 개혁 성향이 강한 교구를 분할하고, 보수적인 주교들을 새로 임명했다. 신학자들은 교수 자격을 박탈당하고, 검열 제도가 강화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바티칸은행의 미국인 이사인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가 시칠리아의 마피아와 연결된 이탈리아의 수완 좋은 사업가들과 몇 차례 거래했는데도 그를 보호함으로써, 바티칸이 복음보다 체제 유지에 더 관심이 많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과 동일한 입장을 취해 군사독재로 신음하던 라틴아메리카 민중에게서 신뢰를 상실했다.

이런 역전 현상을 지켜보면서 미국 교회의 토마스 제이 검블턴 주교는 “바티칸과 교황권을 ‘탈신화화(脫神話化)’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때로 바티칸 역시 인간의 다른 도구들처럼 악을 행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칼 라너, 라칭거 등과 더불어 독일 교회의 공의회 신학자였던 한스 큉은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즉위 1년 만인 1979년 12월 18일에 바티칸으로부터 가톨릭신학을 가르치는 교회법적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가 교황의 무류성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한스 큉

한스 큉은 자서전에서 “공의회가 아니라 공의회에 대한 배신이 교회를 위기로 몰아넣는다.”고 말했다. 공의회 이전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현대 사회의 세속주의 경향’에서 교회를 보호하려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의회 이전 교회야말로 세속주의에 침식되어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권력을 지향해 왔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바티칸이 자본과 권력 투쟁의 아수라장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 권력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교회를 ‘하느님 백성’의 다양한 견해가 자유롭게 공론의 장으로 나올 수 있는 투명한 사회로 변화시키는 길뿐이다. 수도회에서는 ‘공동 식별’을 강조하고, 현대 사회는 ‘다중 지성’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권위적인 교회’와 ‘교황 유일 체제’는 시대정신에 역행한다. 교회에서도 ‘지방자치’가 허용되어야 하며 지역교회 사제와 신자들이 자신들의 리더십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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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2018-10-07 05:04:28
몇가지 오류가 보입니다.
시대에 맞게 적절한 교황과 가르침들이 있었따고 이해할수도 있는 부분들이 많은데도 모든 시대의 교회에게 한가지 기준만을 적용하는것은 균형감을 잃어버린 논리입니다. 그리고 알려진, 여러가지 의도로 여러가지 사심이 첨가되 알려진 정보들을 선별하는 과정이 없이 편식하듯 취해 근거로 삼아 전개되는 주장도 일부 있습니다. 또 가난한 사람과 함께한다는 행위만으로 모든것이 합리화 될수 없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2차공의회후로 너무 오바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균형을 잡느라 반대의 움직임에 힘이 실린것일수도 있습니다.